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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잉여의교육학

그 많던 말은 어디로 갔을까?: <학교2013>과 <후아유>


<교육공동체 벗>에서 내는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2015년 9,10월호)에 기고한 글





그 많던 말은 어디로 갔을까?


- 드라마 <학교 2013>과 <후아유 - 학교 2015>



주의 - 이 글에는 학교 2013후아유 - 학교 2015의 결말이 언급돼 있습니다.

 

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방송계의 화제작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은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가요제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보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교육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드라마 학교시리즈를 꼽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2년 전 겨울을 뜨겁게 달군 학교 2013과 달리, 후아유 - 학교 2015에 대한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드라마가 재밌다는 이야기는 보이지만 학교 2013처럼 언론 매체나 SNS에서 주목받지는 못했고, 오늘의 교육이나 교육공동체 벗 카페에도 전혀 언급이 없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학교 2013후아유에 담긴 이야기

 

학교 2013후아유모두 학교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우선 학교 2013일진으로 분류되는 남학생들의 물리적 폭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갈등의 중심에 있는 학생 오정호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학교폭력의 가해자다. 이런 오정호의 마음에 다가서려는 소위 참교사정인재와 냉소적인 입시 강사 강세찬이 때로 대립하고 때로 협력하며 성장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따뜻한 감동과 동시에 무거운 질문을 남겼다. 또한 대개 학교를 다루는 콘텐츠에서 주로 폭력의 현재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학교 2013은 일진 출신 고남순과 박흥수의 애틋한 우정을 통해 폭력의 미래, 즉 학교폭력 당사자들이 삶에서 감당해야 하는 몫까지 보여 준다. 이렇게 드라마의 내용 자체가 깊기도 했지만, 때마침 출범한 박근혜 정부가 학교폭력을 4대 사회악으로 지목하면서 학교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이런 흐름 속에 학교 2013은 학교(폭력)에 대한 하나의 텍스트이자 담론의 매개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제 후아유를 보자. 후아유의 중심 갈등은 여학생들 사이의 왕따 현상이다. 주먹질과 발차기만 없을 뿐, 인격 모독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이 경험하는 폭력은 피해자가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매우 심각하다. 지독한 악역으로 그려지는 가해자 강소영은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교묘하게 학생들 사이의 관계를 장악함으로써 폭력을 행사한다. 주로 물리적인 폭력이 동원되는 학교 2013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또한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망 때문에 반쯤 자발적으로 가해자들의 물주 노릇을 하는 피해자의 에피소드가 다뤄지고, 괴롭힘 장면에 카카오톡이 등장하는 등 후아유에는 학교2013이후 지난 2년 사이 공론화된 학교폭력의 다른 결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후아유는 학교(폭력)에 대한 의미 있는 텍스트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후아유를 본격적으로 다룬 교육매체의 리뷰는 아예 없다시피 하고, 후아유를 언급하는 일반 언론 기사들은 학교(폭력)에 대한 분석을 전개한다기보다는 내용을 간단히 짚어 주는 정도에 그친다.

 

이 차이는 언뜻 두 드라마의 짜임새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내 나름의 관점에서 정리하면, 학교2013교사들의 포르노라 할 수 있을 만큼 교사 중심적이고 노골적으로 학교물을 지향하는 데 반해, 후아유는 주인공이 학생이고 배경이 학교긴 하지만, 그 알맹이는 트렌디 드라마의 흥행 코드로 꽉 차 있다[각주:1]. 그러다 보니 후아유는 후반으로 갈수록 러브 라인이 부각되면서 이야기의 초점이 분산됐고, 펼쳐 놓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수습하려는 결말의 개연성도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교폭력이라는 소재의 무게감이 사라질 정도로 내용이 산만하지는 않다. 학교라는 시스템의 한계 안에서 좌절하는 이들의 고민과 아픔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그려졌다. 소위 교육계후아유에 보이는 무관심을 단순히 러브 라인이나 막장 코드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교사의 이야기, 학생의 이야기

 

학교 2013어른들은 모르고 아이들은 감추는 진짜 학교의 이야기라는 말로 시작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 드라마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전면에 내세운다. 드라마 초반의 학교는 마치 교사와 학생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라도 있는 것처럼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냉랭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폭력이 등장할 때는 흡사 전쟁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엄한 학생부장이 소위 문제 학생들을 통제하는 방식이나 오정호가 여교사인 정인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 강세찬이 권위적인 말투로 오정호를 제압하는 장면 등은 신뢰로 맺어지기는커녕 권력 다툼의 쌍방이 되어 버린 교사와 학생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래도 학교 2013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일진 학생들은 계속 싸우고 으르렁대면서도 서로를 조금씩이나마 이해하고, 성적 경쟁이 우정을 잠식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학생들도 생긴다. 폭력밖에 모르던 오정호는 자신을 끝까지 붙잡는 교사들의 정성에 나쁘게는 안 살게요정도로 화답(?)하기도 한다. 그리고 학교를 떠난 오정호를 기다리는 교사들의 훈훈한 대화가 엔딩을 장식한다. 제작진은 아마도 무능한 학교 시스템을 열심히 땜질하고 있는 교사들의 노력에 희망을 걸고 싶었을 것이다. 분명 교사와 학생 모두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학교 2013은 교사들의 욕망을 투사한 드라마에 가깝다.

 

반면에 후아유에서 교사의 존재감은 크지 않다. 유일하게 비중 있는 교사 김준석은 학교 2013의 강세찬처럼 과거 교사로서 실패한 경험 때문에 학생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다만 강세찬이 정인재의 인력에 의해 학생들과 부대끼며 그 상처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면, 김준석은 시스템의 한계 속에서 좌절하다 학교를 떠나고 만다. 대부분의 사건에서 교사는 교실에서 벌어지는 문제 상황에 대해 해결은커녕 갈등의 전개에도 전혀 개입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그려진다. 학교 2013에서 교사들이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변화를 이끌어 내고자 했던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또한 후아유는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교사는 물론 아예 학교라는 시스템 자체를 배제시킨다. 학교 2013에서 교사와 학생을 가리지 않고 충돌하던 오정호와 달리 후아유의 강소영은 교사들과 전혀 갈등하지 않는다. 강소영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인물들이 경험하는 폭력의 발생도 전개도 해결도 거의 학생 집단 안에서만 이뤄진다. 학교의 역할은 학폭위를 통해 어중간하게 갈등에 양념을 치는 정도에 그친다. 그나마 학교 2013에서 희망의 가능성으로 그려진 교사들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시스템을 통한 문제 해결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사적 구제이다. 후아유에서 마지막에 갈등이 해결되는 이유는 주인공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강한 대항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고은별은 강소영의 협박에는 협박으로 맞서고, 기싸움에서나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 것은 물론, 강소영이 반성하도록 회유하기보다는 철저하게 가해의 대가를 치르도록 밀어붙인다. 결국 강소영은 가해자의 낙인을 안고 사라진다.

 

이 결말에는 교훈은커녕 냉소적인 복수와 응징의 이미지가 아른거린다. 제작진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후아유에는 교사/학교라는 공적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학생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일 뿐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학교 2013이 교사들을 위한 드라마였던 것에 반해 후아유는 특별히 학생들을 위한드라마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저 사회적으로 발생한 문제에 대해 사적인 해결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각주:2]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의 세계를 다룰 뿐이다.

 

이렇게 이야기의 흐름을 대조해 보면 학교 2013후아유에 대한 반응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학교 2013은 학교라는 무능한 시스템 속에서 진지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교사들에게서 희망을 보는 이야기이다. 현실의 교사들은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드라마에 대입해 보기도 하고, 자신의 경험에 기초해 극 중 묘사되는 학교의 풍경이나 주인공들의 판단을 분석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후아유는 교사/학교라는 공적 시스템에 효력 상실을 선고한다. 의미 있는 고통도 위안도 기쁨도 철저히 학생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만 발생한다. 극 중의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교사들도 이야기에 스스로를 대입하거나 뭐라 말을 보탤 여지가 거의 없는 것이다.

 

교사가 중심이냐 학생이 중심이냐를 놓고 드라마 자체의 가치를 비교할 수는 없다. 내 관점에서는 두 드라마 모두 재밌고, 또 이야기할 거리도 많은 의미 있는 텍스트이다. 하지만 교육 담론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이야기의 중심이 교사이냐 학생이냐의 차이는 매우 크다. 교육희망이나 우리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의 교육만 봐도 독자는 물론이고, 편집위원을 비롯한 필자의 절대 다수가 교사이다. 이러니 후아유처럼 교사 입장에서 할 이야기가 없는 텍스트에 대한 논의를 교육 매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후아유에 대한 논의의 부재는 학생들의 경험에 대한 해석의 상실을 암시한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우리의 교육 현장에 대한 집단적 이해에 빈 구멍이 생긴다. 한국 사회에서 학생이라는 집단은 실질적인 권력도 부족하지만, 담론 수준에서 경험에 대한 해석의 주체로서도 전혀 존중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각주:3]. 물론 교사들이 교육 담론을 주도하는 것은 나쁘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우리가 읽고 있는 텍스트에 담기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으며,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현재 통용되는 교육 담론에는 분명한 편향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후아유와 교육 불가능

 

후아유에서 한 가지 더 읽어 낼 수 있는 포인트는 교육 불가능 담론의 각론을 채우는 접근법이다. 학교 2013이 그려 낸 학교의 풍경은 학교의 위기와 정상화 담론에 근거하고 있는 반면, 후아유는 교육의 불가능성이라는 선언에 담긴 이 시대 교육의 파국적 상황을 그려 낸다.

 

위기의 극복이 목표로 하는 것은 과거의 정상성의 회복이다. 교육의 위기가 목표로 하는 것은 학교교육의 정상화이지 새로운 학교교육이 아닌 것이다. (……) 그러나 파국 혹은 재난의 위상은 다르다. 파국과 재난은 지금까지의 생활양식이 원천 무효이며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어떤 교육을 할 것인지가 질문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자체가 질문되는 것이 파국 혹은 재난적 상황이다. (……) 교육의 불가능성이란 지금 교육을 위기가 아닌 파국으로 인식하자는 제안이다.

- 엄기호, ‘위기가 아닌 파국으로서의 교육 불가능성, 그리고 가능성’, 교육공동체 벗 카페

 

학교 2013역시 학교라는 시스템의 한계를 가볍게 다루지는 않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는 학교교육의 정상화에 가깝다. 반면에 후아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학교라는 시스템의 작동을 이야기의 중심에서 배제해 버린다. 그리고 거기 살아가는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학교라면 이래야 한다, 교사라면 이래야 한다는 기대에 들어맞지 않는 현실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기대가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을 그려 내는 것이다. 후아유가 막장 트렌디 드라마인 것도 사실이지만, 이 드라마의 학교 현장에 대한 접근법은 교육의 불가능성이라는 커다란 화두를 구체적으로 채워 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참고할 수 있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나 민주주의같은 총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결국 미시적인 수준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풍경을 관찰하고 분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후아유같은 막장 트렌디 드라마에서도 소위 헬조선에서 벌어지는 각자도생의 살풍경과 냉소주의를 읽을 수 있듯이, 지금까지 통용된 생활양식이 원천 무효라는 관점에서 포착할 수 있는 작지만 다양한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이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이해하는 퍼즐조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학교 2017을 기대하며

 

2년 뒤, 학교 2017은 또 어떤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올까? 개인적으로는 학부모의 이야기가 다뤄지는 것을 보고 싶다. 학교 2013에서도 후아유에서도 학부모는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자식(학생)들 입장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공부와 높은 성적만을 강요하다 삶을 파괴하는 애증의 대상이고, 교사들에게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학교에 갑질 하는 진격의 거인같은 존재가 학부모다. 몇몇 예외로 등장하는 소위 좋은 부모들은 비현실적으로 낭만적이다. 드라마에 환상과 과장은 필수라지만 좋은 쪽이나 나쁜 쪽이나 너무 극단적이다 보니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대다수 학부모의 현실과 고민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학교 2017이 만들어진다면 시민으로서, 또 한 사람의 부모로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성장하는 학부모의 모습이 담기길 기대한다.

 

사실 어떤 내용으로 돌아오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거기서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은 담론 생산자들의 몫이다. 개인적으로 한 텍스트에 대한 해석과 반응에 문제가 있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도 반응도 없는 현상 자체에 문제의식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저 할 말이 없다는데 왜 없냐고 따지는 느낌이라 살짝 오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의미를 만드는 것은 해석이다. 학교 2013이 인기 드라마에 그치지 않고 좋은 텍스트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말을 보탰기 때문이다. 그 많은 말들이 후아유같은 막장 드라마에도 쏟아지는 것을 보고 싶다. 재밌는 드라마는 소문을 내야 제 맛이고, 덤으로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교육 담론이 더욱 탄탄하고 풍성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1. 일란성 쌍둥이 자매, 입양, 죽음, 기억상실, 여1 남2의 삼각관계(심지어 남자 한 명은 부모 이혼의 상처를 안고 아버지와 갈등하는 부잣집 도련님이고, 다른 한 명은 가난한 가정에서 따뜻한 아버지와 둘이 사는 운동선수다), 중심인물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한다는 점, 여기에 스릴러의 요소까지 더해져 정말 ‘있어 보이는 그림’을 만들 조건은 다 갖췄다. [본문으로]
  2. 지그문트 바우만 씀, 조은평 ․ 강지은 옮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2012, 207쪽. [본문으로]
  3. 담론 생산의 수준에서 교사와 학생을 경쟁 관계로 설정할 이유가 없다. 교사들의 이야기를 덜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오늘의 교육》도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늘의 교육》은 창간준비호를 포함하면 지금까지 29권이 발간됐다. 다음 호면 30권이다. 이 중에 학생이 직접 쓴 글이나 하다못해 학생의 목소리와 경험을 주요 자료로 작성한 글이 실린 게 몇 권이나 될까? 권수가 아니라 전체 글의 편수를 따지면 그 비율은 더 떨어질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