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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잉여의교육학

교육 불가능과 평생교육




<교육공동체 벗>에서 내는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2015년 1,2월호)에 기고한 글




교육 불가능과 평생교육



 

2013년 2월에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니, 대학원을 떠난 지도 벌써 2년이다. (반강제로) 2~3년의 쉬는 시간을 가지고 다시 같은 전공에서 박사 공부를 시작하겠지 싶었는데 인생은 역시나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우연의 연속인지라 어째 마음은 점점 공부에서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교육에 관련된 텍스트를 읽거나 쓸 때면 ‘평생교육’이라는 우산 아래 서있는 스스로를 확인하곤 한다.


솔직히 최근 1년을 돌아보면, 책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교육을 주제로 한 글을 읽거나 쓴 일이 많지는 않다. 어차피 박사 진학을 준비할 것도 아니다보니 요즘 읽는 책들은 교육학 전공서적이라기보다는 여러 분야의 교양서들에 가깝다. 그나마 꾸준히 읽는 교육 관련 텍스트라면 격월간으로 출간되는 《오늘의 교육》 정도이다. 《오늘의 교육》은 ‘교육공동체 벗’에서 출간되는 격월간 교육전문매체로 2011년 창간됐다. 아마 《오늘의 교육》이나 교육공동체 벗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교육 불가능’이라는 표현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교육 불가능 담론은 2000년대 초반 한국사회에 통용된 ‘학교 붕괴’ 혹은 ‘교실 붕괴’ 담론 이후, 교육운동 진영에서 그나마 폭넓게 수용된, 그리고 언론 등을 통해 공유된 문제의식이 아닐까 한다. 주구장창 ‘교육 희망’만 외치던 전교조 집행부에서 2013년에는 기조 논의에 교육 불가능이라는 표현을 집어넣기도 했으니 말이다.

 

한 무리의 교사, 연구자, 시민들이 오늘날 한국의 학교 교육에 대하여 ‘교육 불가능’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학교에 아이를 맡기지 않을수록 아이가 덜 고통 받는다는 것, 학교가 아이들을 보호하고 성장시켜 주기는커녕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상처를 유발하는 숙주가 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교육희망’이라는 기만적인 수사 말고 ‘교육 불가능’이라는 한계선상에서 우리 교육을 바라보자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사실 말이지만, 지금 학교가 존립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국가는 거둔 세금을 써야 하고, 교사는 월급을 받아야 하며, 학생은 졸업장을 받아야 하고, 부모는 아이를 맡길 데가 없기 때문이다.


- 이계삼 <교육 불가능의 시대> 한겨레 신문 칼럼(2012.1.5.)

 

이 정도면 한국사회에 던지는 일갈, 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2011년 ~ 2012년까지 이어진 교육 불가능 담론의 초기 끗발(?)이 언제부턴가 정체돼있다는 것이다. 시리즈로 나오는 영화는 1편이 제일 재밌고, 어지간한 가수들은 데뷔 앨범 이상의 퀄리티로 후속 앨범을 뽑아내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원래 그런 거라며 그냥 넘어가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적어도 나는 교육 불가능 담론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글로 써서 공유하고 풀어야 할 텐데 항상 별다른 일 없이도 바쁜 일상에 마감도 없는 글을 써낼 의지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마침 《오늘의 교육》에서 ‘교육 불가능 깊게 읽기, 다르게 읽기라는 기획을 한다기에 잽싸게 손을 들었다. 내가 교육이라는 현상을, 교육 실제라고 이름 붙여진 현실을 들여다볼 때 거치는 필터인 ‘평생교육’ 담론과 ‘교육 불가능’ 담론의 관계는 어떨까, 라는 궁금증이 떠올랐다. 아래는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탐구과정이다.

 


평생교육 담론과 학교의 교육 불가능

 

나에게 평생교육 담론의 의미를 짧게 표현하라면 가르침과 배움의 경험에 대한 민주화의 움직임이라 답할 것이다. 평생교육의 우산 아래 공부하는 연구자들은 연령·계급·젠더·기타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교육의 주체들이 다양한 공간과 시간에 걸쳐 경험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양상을 ‘가시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일을 굳이 가시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아직도 [교육≒학교]라는 관념이 한국 사회에 지배적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평생교육은 문자 그대로 ‘평생’에 걸친 가르침과 배움을 다루기 위해 개념적으로 내부에 학교교육을 포괄하고자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학교교육에 대한 안티테제”(한숭희, 양은아, 2007, 평생교육 맥락에서의 인문학습의 새 지평: 인문학 위기론의 재해석)로 자리매김하며 입지를 다져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육 불가능 담론과 평생교육 담론은 만난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 서문에는 평생교육 연구자라면 인상 깊게 읽을 만한 구절이 있다.

 

물론 교육 불가능한 학교에도 아이들은 있고, 아이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감동적인 성장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교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학교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토에서 아이들끼리 혹은 교사와 아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사례를 들어 여전히 학교 안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낡은 체제를 유지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평생교육의 기본 가정 역시 “학교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토에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만들어낸 “감동적인 성장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라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교육 불가능 담론의 학교체제 비판에 담긴 문제의식은 평생교육 담론 내부에서 구체적인 연구대상의 차이만을 품은 채 반복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교육의 입장에서 학교는 사회에 필요하지만 이론적으로나 정책상으로나 지나치게 형식화되어 있기 때문에 변화의 움직임을 추동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견고한 요새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게 학교가 덩그러니 동떨어져 흉물스러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덕분에 평생교육 담론 내부에서 ‘학교 교육 중심성’을 비판하거나, 개별 연구가 가지는 함의를 학교교육의 한계에 비추어 강조하기 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학교에 대고 ‘교육 불가능’을 말하는 것은 결국 평생교육 연구자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만날 했던 소리”에 가까운, 하나마나 한 얘기일 수 있다.


그렇다고 교육 불가능 담론과 평생교육 담론의 핵심은 결국 같다! We are the World! 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양 담론의 비교·분석에서 함의를 찾기 위해서는 학교라는 ‘교육 문제의 블랙홀’을 넘어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 평생교육의 ‘시대’

 

교육 불가능 담론의 경계는 격월간 《오늘의 교육》의 초창기 기획들을 모아 출간된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통해 그려볼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에 주목하면, 우리는 교육 불가능이 학교라는 제도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겨냥한 담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혁규 교수는 교육 불가능 담론의 내용이 실질적으로 기존 한국사회의 교육문제 비판과 큰 차이가 없음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마도 《교육 불가능의 시대》가 이런 기존의 문제 제기에서 핵심적으로 나아가는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을 받고 졸업을 해도 취직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냉엄한 현실을 언급한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정규직으로 취업하기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학벌주의에 기반한 의미 없는 공부로부터 탈피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 이혁규 <‘교육 불가능의 시대’ 이후를 사유하기> 《오늘의 교육》 17호.

 

이 역시 신자유주의 비판이라는 큰 흐름 안에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주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교육 불가능’이라는 명명을 통해 우리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교육의 가능성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가르침과 배움을 통한 성장이 가지는 의미를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결코 학교만을 철저하게 분석한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보면 교육 불가능 담론이 학교라는 제도만을 문제시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공부하는 과정이 공동의 용기를 생산하는 과정이 아니라 개인적 고립과 비겁만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정치적 위기이다. 그러나 이 위기는 대학만의 위기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당대의 위기를 공유하고 있는 위기로서 대학의 위기를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 전체가 비겁해진 것은 아닌가?


- 엄기호 <카이스트의 유령들> 《교육 불가능의 시대》

 

하지만 교육공동체 벗과 《오늘의 교육》을 둘러싼 논의 지형에서 교육 불가능 담론은 사실상 학교교육의 문제와 위기에 대한 비판으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적으로 교육 담론을 생산하고 퍼뜨리는 주체의 대다수가 공간적으로는 학교, 시간적으로는 학령기 안팎에 위치한 (대안)학교 교사, (청소년)인권 활동가, (학교)교육 연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다 보니 시대 담론으로서 등장한 교육 불가능 담론이 점차 확산되는 과정에서 학교에 대한 비판만이 부각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육 불가능 담론을 다시 사유할 때 필요한 관점은 시대 담론으로서 교육 불가능 담론이 가지는 의미에 주목하는 것이다. 교육의 문제를 학교라는 시공간 안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둘러싼 이 사회, 이 시대를 분석함으로써 어째서 교육이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고 있는지 탐구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교육 불가능 담론이 평생교육 담론과 교차하는 지점 역시 바로 이 ‘시대’가 아닐까 한다.


어느 교육 담론이 안 그렇겠냐마는 평생교육 담론 역시 시대의 맥락에 발 딛고 있다. 인간은 그 존재 이래로 평생에 걸쳐 가르치고 배워왔지만, 평생교육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견고한 산업자본주의의 구조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더불어 유동적인 지식경제사회로 탈바꿈한 이후로 볼 수 있다. 지식경제사회의 도래 이후, 사회 구성원들은 과거처럼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통해 노동시장에 진입하고 평생에 걸쳐 노동자로서의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대로 끊임없이 “유동하는”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지속적으로 재교육을 받지 않으면 노동자로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 직업능력개발이 평생교육의 한 축을 형성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냉전기를 넘어 민주주의 정신이 전파되고 시민사회가 성숙해감에 따라 사회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인문교양교육의 움직임이 자생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이 시대의 평생교육 담론은 크게 ① 신자유주의 사회에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직업능력개발과 ②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를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두 갈래의 움직임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두고 평생교육 내부의 스펙트럼이 넓다고 경탄할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스펙트럼이 넓은 것이 아니라 뿌리부터 모순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평생교육 연구자인 나윤경은 “평생교육이 기술주의와 인문주의의 두 축을 계속 고수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적이거나 불가능한 꿈에 대한 무모한 도전과 희망을 탑재한 채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 표류의 방향은 평생교육이 “‘자격’과 ‘스펙’ 중심의 인적자원개발로 구성되고 상상”(나윤경, 2013, 평생교육의 오래된 새 길: 전환학습적 인문학으로의 선회)되는 무거운 현실이다. 과연 이 냉혹하고 무거운 현실 속에 평생교육의 가능성을 낙관할 수 있는지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평생)교육이 불가능한 시대

 

최근 평생교육 담론의 실천영역에 있어 전 지구적으로 중요한 이슈 중 하나는 ‘선행경험학습 인정’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국가교육과정 바깥에서의 학습경험을 학력과 유사한 자격으로 인정하는 제도이다. 학습자의 다양한 경험을 사회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분명 배움의 경험을 민주화한다는 평생교육의 이념을 반영한다. 하지만 한국보다 먼저 이 제도를 도입한 스웨덴의 사례를 살펴보면, 어떤 경험은 인정하고 어떤 경험은 인정하지 않는가라는 기준의 설정은 물론 제도의 실제 작동에 이르는 과정 전반이 철저하게 경제발전담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신자유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국가가 아니라 많은 평생교육 연구자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북유럽의 스웨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다양한 학습 경험’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결국 그 다양성이 기업이 요구하는 인적자원으로서의 역량 리스트에 그칠 때, 사회구성원들의 배움은 곧 자기계발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 평생교육 담론은 국가의 표상이기도 한 학교의 외부에 둥지를 틀고 고유의 영역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렇게 발전한 평생교육의 가능성은 곧 노동유연화의 가능성, 기업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시민사회와 복지에 대한 철학이 없는 국가에서 점점 평생교육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늘어나는 것은 결국 이게 ‘돈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생교육 담론이 안주하는 학교 바깥의 공간에는 시장이라는 통치자가 웅크리고 있다. 학교로 표상되는 국가권력의 통치로부터 벗어날 때 마주치는 것은 시장이라는 또 다른, 아니 더 강력한 권력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국가와 시장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한다. 기업이 요구하는 역량과 스펙의 지표는 결국 국가에서 인정하는 학벌과 자격증이 대다수이다. 그래도 국가가 통치하는 학력 중심의 교육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시도는 물리적/상징적 공간인 학교에서 벗어남으로써 첫 걸음을 뗄 수 있다. 하지만 평생교육 담론은 시간적으로 전 생애, 공간적으로 전 사회를 그 지평으로 하기 때문에 탈주할 수 있는 외부가 없다. 학교의 문제는 바깥에서 바라보며 손가락질이라도 할 수 있지만, 평생교육의 문제는 그 바깥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교육 불가능이 이 시대의 문제라면, 그 문제는 학교라는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평생교육의 지평에서 발생한 것이다. 전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에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도 나타난 것이다. 학교와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같은 뿌리를 가진다. 인권은 성인과 교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인 청소년, 학생들의 문제issue인 동시에, 일터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비정규직) (예비) 노동자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 인간 존재의 목적을 성적과 진학으로, 혹은 경제적 수단으로 도구화하고 인권을 부정하는 것은 똑같은 야만이다. 


또한 “교육을 환대하지 않는”(지그문트 바우만의 에세이 제목에서 차용태도는 학교뿐만 아니라, 평생교육의 현장으로 각광받는 일터, 즉 기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직업세계의 문제가 고등교육으로, 중등교육으로 점점 전이된 것이다. 기업은 신입사원의 가능성을 보고 뽑아서 잘 가르칠 생각은 없고, 학벌, 영어성적, 자격증 등의 스펙이 가장 높은 사람을 찾는다. 드라마 《미생》에서 보았듯이, 이 사회 어디에서도 스펙 하나 없는 “보기 드문 청년” 장그래의 자리를 찾기는 어렵다. 반면 인턴 때부터 실적을 팍팍 올리는 에이스 안영이는 모두가 탐낸다. 이를 직업세계의 냉혹함이라고 설명하기에는 교육기관도 별로 다르지 않다. 고등학교와 대학은 교육과정을 통해 학생들의 가능성을 어떻게 발현시킬 것인지 고민하기보다 성적이 우수한 자원을 뽑을 방안만 찾고 있다. 학교도 기업도 조직 안에서 이뤄지는 배움과 성장을 촉진하기보다 선발과 평가를 통해 (예비) 학생과 (예비)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을 쏟아 붓도록 유도한다. 여기에는 가르침의 기회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득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없고,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에 인센티브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동물만이 남아있다.


이렇게 한 인간이 태어나 영·유아 시기부터 학령기를 넘어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의 국면에서 교육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평생교육 담론은 이 불가능의 파국을 직시하지 않는다. 교육 불가능 담론은 “학교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토에서 만들어 낸 희망”이 학교의 가능성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반면 평생교육 담론은 국가와 시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기술주의), 국가와 시장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미치는 영토에서 피어나는 가능성에 찬사를 보냄으로써(인문주의) 교육을 환대하지 않는 권력의 문제를 회피한다. 신자유주의 비판은 평생교육 개론서에는 물론 학술논문의 이론적 배경에도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정작 그 문제를 본격화하고 돌파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평생교육학자나 실천가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평생교육의 이념과 철학이 신자유주의 질서에 의해 전유되고 있”다고 현실 탓을 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이념을 탑재한 자기주도, 창의, 자율 등의 실천들을 비판적으로 읽으며”(나윤경, 앞의 글) 그 이념과 철학의 근본부터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다.

 


평생교육의 이념에 대한 성찰

 

평생교육 담론의 중요한 목표이자 성과인 교육의 민주화는 권력에 의해 승인되는 경험뿐만이 아니라, 학습자의 모든 경험이 배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만하다는 전제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모든 경험이 의미 있다는 선언은 역설적으로 아무 경험도 의미 없다는 뜻이 될 수 있다. 교육에 있어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신성시하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무엇이 배움이고 무엇이 아닌가?’,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경험은 무엇이고 또 무엇이 아닌가?’처럼 교육을 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질문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된다. 그렇게 교육은 학습자의 경험에 매몰된 사적인 것이 되고 교육의 주체들은 “사적인 문제들에 대해 사회적인 해결책을 기대하기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사적인 해결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할 수밖에 없다. 사회의 문제인 양극화와 노동시장구조의 문제 앞에서 스스로 자기 계발하는 주체가 되는 것 외의 해법을 상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담론이 실제를 구성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공적인 물음을 품지 않는 교육 담론은 교육 실제를 그려내는데 있어 지배적인 사회 현실의 영향을 거스르기가 어렵다. 한국이나 북유럽이나 평생교육 연구자들이 다루는 이론, 현 시대에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북유럽의 평생교육이 한국의 평생교육에 비해 아름답기 그지없어 보이는 이유는 “사민주의식 복지사회의 오랜 전통 하에 노동자들이 고용에 대한 불안 없이 노동과 시민사회학습을 모순 없이 병행할 수 있”(나윤경, 앞의 글)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은 북유럽의 현실과 매우 다르다. 교육의 눈으로 이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시하는 질문이 필요한 것이다.

 

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실상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고, 교육의 목적을 묻는 것은 결국 시대의 가장 큰 비전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큰 질문이 없는 교육은 기능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교육에서 ‘래디컬하다’는 것은 결국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끝없이 묻는 것이다.


- 박복선 <교육불가능, 교육의 근본을 묻는 것> 《오늘의 교육》 19호

 

위의 문장을 인용한 글에서 박복선은 학교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좋은 사회란 어떤 것인가”,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큰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며, 교육 불가능을 선언하는 것이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평생교육 담론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큰 질문이 아닐까. 

 


함께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질문하기

 

사실 교육 불가능 담론과 평생교육 담론이 직면한 문제 상황은 비슷하다. 박복선이 지적한 “큰 질문의 부재”라는 문제는 평생교육 담론뿐만 아니라 교육 불가능 담론의 현주소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다시 말해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사표師表, 즉 대안적 삶의 모델을 찾기 어려운 이 시대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그리고 사람이 되어가는becoming 일이다. 그렇지만 현실의 학교교육은 물론 평생교육 역시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지 못하다. 이 냉엄한 시대에 ‘필요한 시민’으로서 추구해야 할 인간상에 대한 물음을 던질 때, 비로소 시대로부터 ‘요구받는 인재상’을 발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흐름에 저항하고, (평생)교육 불가능의 시대 이후를 상상할 수 있는 미약한 희망이나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바우만은 이러한 문제가 온전히 교육현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불안정하게 유동하는 시대 전체의 것이라고 본다.

 

언제나 지식은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하기 때문에 가치 있게 생각되어 왔다. 하지만 정작 그 세계가 계속해서 현존하는 지식의 진리를 거역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면, 다시 말해 ‘가장 많이 아는’ 지식인들조차도 끊임없이 깜짝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면 어찌해야 할까?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어제까지의 믿음에 배반당하기 십상이라면 결국 오늘의 최신정보 외에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이 답이며, 지금 이 순간 안에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비전을 통합하는 것, 곧 가르침과 배움을 통한 성장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이런 시대에 “배움이란, 영원히 파악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손에 쥐는 순간 곧바로 녹기 시작하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뒤쫓는 일”(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이 된다. 무의미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 그것이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생존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다. 즉, 이 시대 교육 불가능의 핵심에는 정치의 위기, 나아가 파국의 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관성적인 교육체제 비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화두로 한 철학적·사회학적 사유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교육 현장의 변화는 더디다. 그러다보니 의례적으로 떠올리는 교육의 문제, 관성적인 비판도 항상 의미 있(어 보인)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현실의 벽 앞에서 같은 외침을 반복하기 보다는 우리의 문제의식이 멈춰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것과 같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상황에서는, 의례적으로 우리가 떠올리는 용의자들의 명단을 검토하는 것이나 기존의 관성화된 방식으로 그들에게 딴죽을 거는 것으로는, 어떤 일 - 방식은 다양하지만 동일하게 지상의 모든 거주지에 영향을 미치는 - 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무조건 새롭고 특이하다고 해서 좋다는 뜻이 아니다. 시대 전체를 사유한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으며 기존에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담론의 구조를, 그 안에 담긴 고정관념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육 불가능이라는 문제의식이 평생교육 담론이 놓치고 있는 큰 질문을 돌아보게 했던 것처럼, 평생교육이라는 관점은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탐구할 수 있는 질문의 범위를 크게 넓혀줄 수 있다.

 

담론 생산의 여정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동반자가 있으면 힘이 된다. 평생교육 담론 안에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성장, 시민으로서의 인간 존재를 탐구하며 이 시대 교육의 활로를 찾고자 애쓰는 이들과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말해온 교육공동체 벗의 조합원들은 서로에게 훌륭한 동료가 될 수 있다. 배움은, 비슷한 감성과 논리를 공유하는 집단 안에만 있을 때보다, 다름을 품고 있는 타자이면서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동료인 이들을 만날 때 더욱 풍성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