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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잉여의교육학

공부, 잘할 수밖에 없게 해드립니다?


<교육공동체 벗>에서 내는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2015년 7,8월호)에 기고한 글




공부, 잘할 수밖에 없게 해드립니다?

- 살만 칸,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리뷰


 

대학원에 다닐 때, 화제가 된 교육 분야의 TED 강연이 있다기에 찾아보았다. ‘칸 아카데미’라는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 대한 강연이었다. 강연자인 살만 칸은 헤지펀드 분석가로 일하던 중, 우연히 사촌에게 인터넷을 통해 원격 과외를 해 주면서 교육 실험의 길로 들어선다. 열정적으로 전통적 교실 수업의 한계와 그에 대한 대안을 역설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관중들의 기립 박수가 터져 나오고, 빌 게이츠가 등장해 “교육의 미래를 보았다”며 찬사를 보낸다.





나는 별로 특별한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살만 칸이 칸 아카데미를 개설한 것은 2008년이고, 첫 번째 동영상 수업을 유튜브에 업로드한 것은 그 2년 전인 2006년이다. 그보다 6년 전인 2000년에 한국에는 ‘메가스터디’라는 인터넷 강의 기업이 설립됐고, 2004년 이후 주식시장 상장과 더불어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그 뒤로 인터넷 강의는 대학입시 시장을 넘어 영어, 자격증, 공무원 시험, 전문대학원 입시 등 성인들의 교육 시장까지 장악했다. 인터넷 강의가 혁신이라면 “교육의 미래”라는 찬사는 한국의 교육 기업에 쏟아졌어야 했다. 궁금해진다. 왜 칸 아카데미에 열광하는가?

 

칸 아카데미의 교육 실험

 

살만 칸 스스로가 강조하고 있듯이, 칸 아카데미가 가지는 최대의 장점은 학습장면의 주도권을 교사나 교실이 아니라 철저하게 학습자 개인에게 맞춘다는 것이다. 즉, ‘학습의 개인화’라 할 수 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스스로를 교육한다’는 사실이다. (……) 이 모든 과정은 활동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다. 모든 과정이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교육은 저 높은 창공에서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교사의 입술과 학생들의 귀 사이 빈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교육은 우리들 각자의 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 살만 칸,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 63~64p

 

살만 칸이 볼 때 전통적 교실 수업의 가장 큰 문제는 수준도 다르고, 배움의 속도도 다른 수많은 학생들을 한 명의 교사가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 획일적인 수준과 속도에 맞지 않는 학생들의 머릿속에는 “스위스 치즈”처럼 개념의 빈 구멍이 생기고, 이 빈 구멍이 학습의 걸림돌이 된다. 특별히 새로운 문제제기는 아니다. 학교라는 형태의 근대 교육체제가 성립한 이래 항상 따라붙는 비판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우리에게는 인터넷이라는 기술이 있다.

 

적극적인 배움, 주도적 학습은 각각의 학생에게 언제 어디서 배울지 결정할 자유를 주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인터넷과 개인 컴퓨터의 장점이다. (…) 인터넷에 기반한 교육은 어디서든 공부할 수 있는 혁신적인 이동성을 보장해주며, 이는 학생들이 자신의 개인적 리듬에 따라 가장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게 한다.

- 살만 칸,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 77~78p

 

인터넷의 이동성과 더불어 완전학습이라는 개념이 학습의 개인화를 완성한다. 대개 인터넷 강의는 한 강의가 끝나면 학습자의 수준과 이해도에 관계없이 다음 강의로 넘어간다. 하지만 칸 아카데미의 시스템은 학습자가 개념을 완전히 이해했음을 증명해야 그 개념과 연관된 다른 개념, 다른 강의로 넘어갈 수 있다. 커리큘럼마저 학습자의 속도에 맞춤으로써 빈 구멍 없는 완전학습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인터넷 강의 기업이 모방할 수 없는 칸 아카데미만의 성취이기도 하다. 이제 칸 아카데미를 통해 학습자는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속도로, 완전한 학습을 할 수 있다, 심지어 무료이다. 살만 칸에게 “교육계의 혁명적 구루”라며 극찬이 쏟아진 이유를 알 법도 하다.

 

공학의 가능성과 한계

 

칸 아카데미의 실험은 전통적 교실 수업이 가지는 고질적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시스템을 실제로 구축했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을 만하다. 지금도 다양한 이유로 기초적인 교육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에게 무료 인터넷 강의는 인류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칸 아카데미가 천착한 교육의 문제는 반쪽짜리다. 현상을 기술하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질문, 육하원칙을 떠올려 보자.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 이 여섯 가지 중 칸 아카데미가 던진 질문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세 가지이다. 즉 특정한 지식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배우는지에 대한 방향은 제시하고 있지만, 그 지식을 배우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성찰(누가)은 물론이고, 어떤 지식을(무엇을), 어떤 이유로(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교육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송두리째 빠져 있고, 수단에만 몰두한 것이다. 이는 공학적 접근이 가지는 한계이다. 공학은 본성상 목적을 질문하지 않는다. 우주에 가야 하는지, 아닌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가야 한다는 목적이 있으면 그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공학의 임무이다. 그렇기에 공학적 접근이 유효하려면 광범위하게 합의된 목적, 즉 의심하거나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 칸 아카데미의 시스템이 가정하는 교육의 목적은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지식의 효율적 습득이다.

 

문제는 지식의 성격이다. 칸 아카데미의 완전학습 개념이 적용되려면 ① 하위 개념들이 체계적인 지식의 지도로 정리되고, ② 객관식/단답형 문제로 이해도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자연과학의 지식이나, 역사나 지리처럼 정보의 암기가 이해에 선행하는 지식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개념들 사이의 관계 자체를 문제시하거나, 현상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인문학적 사유, 혹은 사회과학의 비판적 문제 제기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이런 종류의 지식은 학습자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경험과 사회적 지평을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적분의 원리나 중력의 법칙은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나 IS의 테러리스트들에게나 동일하지만, ‘폭력’과 ‘정의’와 같은 개념은 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정답이 없는 지식과 경험의 전수, 즉 교육에 대해 칸 아카데미의 시스템은 무력하다. 살만 칸은 학생들이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진도가 넘어가는 전통적 교실 수업의 문제를 “구멍 송송 뚫린 스위스 치즈”에 빗대어 비판한다. 하지만 한 사회의 구성원에게 필요한 다양한 자질을 놓고 보면 칸 아카데미를 통해, 즉 공학적 접근만을 통해 구현할 수 있는 교육이야말로 커다란 구멍을 안고 있는 치즈에 가깝다.

 

지식과 교육에 대한 공학적인 인식도 늘고 있다. 오차 없는 계산을 통해,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공학의 방법으로 생산해 내고자 하는 것은 예측과 측정이 가능한 인간이다.

- 서보명, 《대학의 몰락》 125p

 

우리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교육은 몇 가지 편향된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제도적으로 강제되는 특정 분야의 지식수준은 지나치게 높고 복잡한 반면, 우리가 교육을 통해 “인간성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는 지나치게 적다.

 

우리는 훌륭한 과학․기술 교육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며, 나는 국가들이 이 분야를 향상시키는 노력을 이제 중단해야 한다고 제안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관심사는, 그와 똑같이 핵심적인 중요성을 띠는 다른 능력들이 지금 경쟁적 혼돈 속에서 소실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있다.

- 마사 누스바움,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30p

 

사실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 인간성의 함양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공학적 접근이 가지는 한계만큼이나 장점과 가능성도 뚜렷하다. 문제는 칸 아카데미의 가능성에 취해 그 한계를 보지 못하는 경우이다. “기술이 교육을 구원한다”거나 “우리가 교육에 대해 꿈꿨던 모든 것”과 같은 찬사는 교육의 목적을 문제은행으로 측정 가능한 지식의 습득으로 한정 짓는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가려지고 소실되는 다른 능력들 역시 외면할 수 없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칸 아카데미와 교실 사이의 분업을 제안할 수 있다. 기초적인 개념과 지식의 전달은 인터넷 강의로 해결하고, 교사들은 교실에서 별개의 활동을 구성해 인터넷 강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학생들을 돕거나, “인간성의 함양”에 힘쓸 수 있다. 이는 실제로 살만 칸이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에서 제시한 미래 교실의 모습이다. <슬로우뉴스>에 소개된 바 있는, ‘거꾸로 교실’의 성공적 사례 역시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뭐든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게 바로 교육 문제의 어려움이자 매력이다.

 

배움과 자유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환상 중 하나는 “배움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처럼, 공부를 잘하면 그리고 많이 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칸 아카데미가 교실에서 소외되는 학생들의 존엄성을 회복시킨다는 찬사를 받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어떤 배움은 분명 인간을 존엄하게 한다. 기초 문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강요된 배움은 존엄과 자유보다는 굴레와 억압에 가깝다. 대표적으로 수험생과 취업준비생에게는 각각 입시의 노예, 취업의 노예라는 꼬리표가 붙곤 한다. 분명 후진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교정해 교실에서 사라진 배움의 즐거움을 복원한다는 목적은 흠잡을 데 없이 고상하다. 하지만 배움이 즐거워진다고 해서 꼭 모든 사람이 특정한 지식을, 높은 수준까지 배울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다른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지식에 높은 성취가 요구되는 이유는 배움의 즐거움보다는 사회적 자원의 습득 때문이다. 기업자본주의의 탐욕은 노동자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소위 ‘좋은 일자리’를 축소하고 (예비) 노동자들로 하여금 더 높은 학력과 더 많은 스펙, 더 많은 배움의 증명을 경쟁하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노동 세계의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구성원 각자가 공부를 더 잘한다고 해서, 다시 말해 완전학습이 가능하다고 해서 삶의 질이 향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스펙의 기준만 올라 점점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배움의 증명이 요구될 것이다.

 

거꾸로 교실이나 살만 칸이 그리는 미래 학교가 놓치고 있는 문제가 여기 있다. 지금도 학생들은 과도한 학습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 강의를 통해 미리 기초 개념과 지식을 숙지하고 학교에서 “거꾸로 교실”의 형태로 수업을 진행한다면, 대체 하루 24시간 중에 학생들이 공부에서 자유로운 시간이 얼마나 될까? 효율적인 학습법에서 교육의 구원을 찾는 사람들은 학습자의 삶에 엮여 있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맥락을 외면한다. 그들에게 교육의 문제는 학습자의 경험과 실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교실의 문제, 보다 구체적으로는 학습자가 좋은 성적을 받는데 실패하게 하는 교실의 문제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칸 아카데미가 학습자 개개인의 재능이나 태도가 아니라 교실이라는 ‘시스템’을 겨냥한다는 사실에 인간 중심적이라며 열광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다. 교실을 둘러싼 경쟁적 구조를 문제시하지 않고 완전학습이라는 수단을 제시하는 것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 공부를 잘해야만 하는 책임을 부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공부를 많이 하고, 잘해야 하는가?

 

칸 아카데미가 암시하는 답은 별로 놀랍지 않다. 바로 ‘기업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살만 칸은 칸 아카데미를 활용하면 “고용주들에게 누가 그들의 회사에 기여할 최상의 준비가 돼 있는지를 실제 지표에 근거하여 알려 줄”(274p)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왕 뭔가를 배우는 거, 자기가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고 생산 활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다만 배워 놓고 보니 기업이라는 생산 형태에 기여할 수 있는 것과 처음부터 기업의 요구에 맞추어 비자발적인 배움을 채찍질하는 것은 다르다. 칸 아카데미에 유독 기업인들이 열광하고 친기업적 재단에서 후원금을 쏟아 붓는 이유를 알 만하다. 이렇게 효율적인 지식 습득만을 위해 설계된 교육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사회구조가 강요하는 과도한 학습의 문제를 은폐하고 기업자본주의에 복무하는 정치적 선전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는 ‘민주주의’, ‘공동체’, ‘시민’처럼 사회의 공공성에 대한 개념이 끼어들어갈 틈이 없다. 지금 칸 아카데미를 극찬하기 바쁜 사람들은 교육의 공적인 성격에 대한 물음을 외면한다. 무료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직과 공공성이 대립한다니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칸 아카데미의 대의가 학습의 개인화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이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감옥과도 같은 획일적인 훈육의 공간을 박차고 나오려는 학생의 욕망은 자기주도적 학습주체를 형성하려는 권력의 욕망과 교차한다. 이미 주어진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유와 희망을 꿈꾸는 주체의 욕망은 자기계발, 자기경영하는 주체를 통해 그/그녀의 삶을 자기책임과 자기실현의 문제로 축소하려는 권력의 욕망과 손을 잡는다.

-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376p

 

전통적 교실 수업이 비효율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비판은 정당하다. 그 안에서 배움의 즐거움을 복원한다는 목적은 아름답다. 다만 그 아름다운 목적에 포개지고, 나아가 지배하는 힘을 가진 권력의 욕망을 의식하고 문제시하지 않으면 애초에 꿈꿨던 자유로운 배움의 즐거움은 온데간데없고 자기계발의 굴레만 남을 것이다. 자유의 욕망이 ‘공적인 것’을 지우고 모든 것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흐름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유와 통치를 새롭게 합성”하는 이 시대 자본주의의 작동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사의 역할과 정체성

 

칸 아카데미의 시작은 살만 칸이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강의였다. 《X세대가 세상을 구한다》의 저자 제프 고디니어는 유튜브가 “두려울 정도로 민주적 자본주의의 최극단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유튜브는 ‘최고만이 인정받는’ 경쟁의 장이다. 칸 아카데미의 설립은 살만 칸의 유튜브 강의가 최고로 분류되었음을 보여 준다. 다만 유튜브가 야만적인 경쟁의 공간으로 남지 않고 어느 정도 민주적일 수 있는 이유는 꼭 최고가 아니라고 해도 도태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인기가 없다고 업로드를 막거나 영상을 삭제하지는 않는다. 또한 유튜브 사용자가 워낙 많다 보니 그들 사이의 취향 차이 덕분에 독점이나 과점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인기의 유무와 관계없이 유지되는 무지막지한 양의 콘텐츠가 바로 유튜브가 가지는 가능성이다.

 

하지만 교육처럼 사회적 자원과 결부된 콘텐츠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한국의 인터넷 강의를 예로 들어 보자.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 분야에서 독보적인 강사가 한 명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개인의 취향 차이에 따라 다른 강사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인터넷 강의를 활용하는 대다수의 학습자들은 이 강사의 강의를 들을 확률이 높다. 역사 교사들 중에는 학생들에게 이 강사의 강의를 듣도록 추천하고, 교실에서는 질의응답과 보충 설명을 통해 거꾸로 교실 형태의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칸 아카데미의 성과와 비전을 극단으로 밀어붙였을 때 상상할 수 있는 디스토피아의 모습이 여기 있다. 학습자들이 1차적으로 지식의 기초 개념을 습득하는 단계가 획일화되는 것이다. 학습자들이 강의를 선택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터넷 강의까지 들어 가며 공부를 하는 이유, 곧 측정과 평가의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주는 강의의 설계자들이 지식의 기초 개념을 지배하게 된다.

 

이는 지식의 발전에 심각한 편향, 혹은 정체를 야기할 수 있다. 교육은 지식의 단순한 주입을 넘어 그 진화와 발전에 관여하는 과정이다. 모든 학문의 발전에는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가 개입되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식과 담론의 진화는 우연성과 타자성으로부터 나온다. 다시 말하면,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연성과 타자성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에는 플라톤의 해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해석이 있다. 수학을 공부한 사람이 만 명이라면, 그 만 명이 가지고 있는 미세한 차이와 발상의 전환이 수학이라는 학문을 발전시킨다.

 

인터넷 강의를 두고 지식의 발전에 끼치는 해악을 운운하는 것은 지나칠 수 있다. 다만 이 문제를 통해 교사로 대표되는 ‘가르치는 사람’의 “강렬한 개인적 정체성”이 교육에서 가지는 의미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측정과 평가의 잣대로 교육을 구성하는 사회에서는 ‘가르침’이라는 행위에 교사들의 정체성이, 다시 말해 영혼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것은 교사의 사적인 취향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자기 정체성과 자존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수업을 기획한다는 것도 이처럼 자기만의 스타일로 학생들과의 소통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수업을 자신이 기획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교사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기획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 엄기호,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208p

 

과장을 좀 보태면, 인터넷 강의 하나로 수천, 수만 명의 교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효율성이 사회를 움직이는 명령이 된 마당에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교사들의 밥그릇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의 소통, 한 명의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공적인 성격의 교육기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활동으로서 교육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점수, 진학률, 취업률, 재무제표 등 매우 직관적인 양적 지표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실의 위기에 처해 있는 능력은 무엇인가? 시험 문제의 답을 잘 맞히는 것이 아니라 존엄한 삶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과연 어떤 가치들이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도 공公교육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육의 공적인 성격, 즉 공공성이다. 최근 인성교육에 대한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미친 스펙의 나라에서는 인간의 모든 능력ability이 직업적 성과와 연관된, 즉 측정 가능한 역량competence으로 표준화되는 경향이 있다. 입학사정관제의 도입을 통해 이미 겪어 본 것처럼, 시험 점수라는 획일적인 기준이 가지는 문제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이것도 잘해야 하고 저것도 잘해야 한다는 식으로 개인에게 짐을 지우는 방식을 내세워서는 곤란하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즉 학습자들이 발 딛고 있는 정치사회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며 교육현장에 다가갈 때 진정 자유를 위한 배움의 가능성이 보일 것이다.

 

칸 아카데미의 사례를 통해 몇 가지 논의를 풀어냈지만 ‘고작’ 하나의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 과한 비판의 잣대를 들이댄 것이 사실이다. 살만 칸이 지적한 교실 수업의 문제는 분명히 중요하며, 칸 아카데미의 시스템 역시 활용하기에 따라 굉장히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에 열광하고 찬사를 보내는 분위기가 환기하는 이 시대 교육의 흐름이다. 성과 중심의 효율적 학습을 복음처럼 찬양하는 공학적 인식에 대항하는 담론을 탄탄하게 구성할 필요가 있다. 대체 가르치고 배우는 장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가르치는/배우는 사람은 어떤 지평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지 꼼꼼하게 짚어 가며 탐구해야 한다. 여기에는 ‘창의성’이라든가 ‘주도적인 학습’처럼 언뜻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개념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는 과정도 포함된다. 나윤경에 따르면, “자기주도, 창의, 자율”은 신자유주의적 이념을 탑재한 개념이며, 엄기호는 학생들에게 “너 하고 싶은 걸 해. 나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라며 자기주도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 “어마어마한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살만 칸의 표현대로 배움은 분명 우리의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상당히 개인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교육을 온전히 한 개인만의 문제로 만들지는 않는다. 배움과 성장에는 타자와의 만남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 만남은 새로운 “공동의 세계를 창조”하는 정치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교육이 공적인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아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