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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잉여의교육학

함께하는 성장과 진화 <무한도전>














<교육공동체 벗>에서 내는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2012년 11,12월호)에 기고한 글

 


함께하는 성장과 진화 <무한도전> 

 


컴퓨터가 없던 어린 시절, 친구들 없이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일은 대개 TV를 보는 것이었다. 심지어 일요일 오전에는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겠다며 누가 깨워주지 않아도 벌떡벌떡 일어나던 기억이 난다. 요즘에는 TV 콘텐츠가 유통되는 방식이 워낙 다양하다보니 예전처럼 긴장감 있게 본방사수를 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방송시간대가 되면 나를 설레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네가 토요일 여섯시 반에 방송된다면 나는 다섯 시부터 설레기 시작할거야바로 <무한도전>이다.

 


<무한도전>의 성장

 

<무한도전>에 대해, 그리고 <무한도전>을 통해 할 수 있는 얘기는 넘쳐난다. 오죽하면 책도 나왔다<웃기는 레볼루션무한도전에 관한 몇 가지 진지한 이야기>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무한도전>을 이야기하는 일종의 비평집이다. 이 책의 많은 꼭지에서 <무한도전>성장이나 진화라는 표현과 함께 다뤄진다. 단순하게 성장이라고 묶긴 했지만 그 안에는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 자체의 성장, <무한도전> 출연자들의 성장, 캐릭터의 성장, 제작진들의 성장 등등 다양한 층위의 성장서사가 얽혀있다.


성장서사가 아예 없는 대중문화 콘텐츠는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주목할 수 있는 점은 <무한도전>이 예능프로그램의 성장담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이다. 한 예능프로그램이 (1회 기준) 2년만 가도 100회 정도 방송되고 방송사의 간판 프로그램이 된다. <무한도전>은 지금 7년째 하고 있다



이 긴 역사를 품고 있으니 어쩌면 <무한도전>을 두고 성장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훨씬 파격적인 일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랜 세월 방영됐다는 것도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아무 이유 없이 오래 방영되는 프로그램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무한도전>이 이렇게 인기를 누리며 장수할 수 있는 이유, 그 저력이 무엇인지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 저력을 프로그램의 형식에서 찾는다. 20111월에 방영된 ‘2010 연말정산특집에서 중견 예능작가는 말한다.


 

저희 작가들이나 PD들 사이에서는 한국 예능은 무도 이전과 무도 이후로 나뉜다, 저희가 방송하는 프로는 어떤 거냐면, 초창기엔 굉장히 바뀝니다. 자리를 못 잡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딱 자리를 잡으면 그 포맷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보수-유지-보수-유지. 저희가 했던 방식이었고 그게 완성형이었는데 그걸 깬 게 무도죠.

 

<무한도전>을 몇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무한도전>은 매 주가 특집이다. 매 주 새로운 포맷으로, 고정된 형식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과 실험, 그에 따른 진화. 이게 바로 <무한도전>의 성장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프레임이다. 그런데 이것도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다. 도전하고 실험하면 진화한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바로 그런 끊임없는 도전과 실험을 가능케 했던 조건이다.


<웃기는 레볼루션: 무한도전에 관한 몇 가지 진지한 이야기>의 말미에는 <무한도전>의 지휘자인 김태호 PD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여기서 김태호 PD<무한도전>매주 다른 특집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7명의 캐릭터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같은 책의 다른 글에서도 비슷한 의견을 발견할 수 있다.

 

<무한도전>의 진화과정은 달랐다. <무한도전>은 실험해 온 모든 과정들을 프로그램 형식으로 끌어안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형식이나 내용을 다변화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로 다시 수렴하는 캐릭터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77p)

 

매 회마다 포맷이 다르다는 파격적인 형식성은 바로 이 캐릭터라는 장치 덕분에 유지된다. 예를 들어, 어떤 특집을 진행하든 노홍철은 빡구가 되거나 사기꾼이 되고, 박명수는 아버님이나 박조커가 되어 웃음을 유발하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게 바로 캐릭터가 가진 힘이다.

 



<무한도전>과 공진화co-evolution

 

그런데 요즘 예능치고 캐릭터가 중요하지 않은 프로그램은 없다. 연기자들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 캐릭터 받을 거야?” “그건 내 캐릭터인데같은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눈다. 아마 2012년 한국의 예능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캐릭터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새 캐릭터는 <무한도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예능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캐릭터뿐만이 아니다. <무한도전>이 실험을 통해 이룩한 성과는 <무한도전> 안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가깝게는 <런닝맨>이나 <남자의 자격>, 조금 멀게는 <패밀리가 떴다><12>과 같은 다른 예능프로그램들에서 <무한도전>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무한도전>의 실험이나 진화가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무한도전>의 경계 바깥으로, 즉 예능프로그램이라는 생태계 전체로 확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무한도전> 역시 갑자기 툭 튀어나온 프로그램은 아니다. 2003년의 <천하제일 외인구단>이나 2004년의 <대단한 도전>과 같은 프로그램들에서는 일반인에게 쉽지 않은 도전과제를 설정하고 훈련하는 과정의 좌충우돌을 코믹하게 그려내곤 했다. 2005년의 <무모한 도전>이 가지고 있던 과제선정-훈련-도전이라는 형식성은 이 두 프로그램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다.


천하제일외인구단-대단한도전-무모한도전

 


처음 <무한도전>을 봤을 때는, <대단한 도전><천하제일 외인구단>을 섞어놓았다는 느낌이었다. 전철과 100미터 달리기, 황소와 줄다리기 시합, 자동세차기나 동전 구분하는 기계와 겨루기 등등 스포츠라고 주장하기는 힘들지만 엄연한 승부의 과정을 통해서 기묘한 즐거움을 자아내는 포맷은 <대단한 도전>을 보는 느낌이었다. (43~44p)

 

야외버라이어티의 성격이 강했던 <무모한 도전>에서 <무한도전 퀴즈의 달인>으로 프로그램이 바뀌고 스튜디오 촬영이 시작되면서 캐릭터가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한다. 좁은 스튜디오 안에서 재밌는 그림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연기자들끼리 말로 행동으로 서로 치고받고 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예능프로그램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시도는 2006년에 <무한도전>이 독립된 프로그램으로 편성된 이후 점차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김태호 PD의 설명대로, 그렇게 캐릭터들이 프로그램의 중심을 잡아주었기에 <무한도전>은 이런저런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 다양한 실험들 중에서 아이스 원정대특집은 아마도 <12>이나 <패밀리가 떴다> 같은 캠핑버라이어티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고,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 ‘나 잡아 봐라(꼬리잡기)’와 같은 추격전들은 <런닝맨>의 모태가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쉘 위 댄스에서 시작해 에어로빅’, ‘WM7’(레슬링) 특집 등 항상 화제가 됐던 장기프로젝트들은 <남자의 자격>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무한도전>으로부터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가지를 쳐서 나오는 것이다.

 

무도 쉘위댄스(2007) - 남격합창단(2010)



무형식학습과 메시지

 

앞에서 ‘<무한도전><12>에 영감을 주었다혹은 ‘<남자의 자격>으로 이어졌다라고 말하지 않고, ‘것이다라는 가정형을 사용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해당 프로그램의 PD나 작가가 직접 얘기라도 하지 않는 한, <무한도전>이 다른 프로그램들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한도전>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무한도전>은 그 자체로 재밌는 예능프로그램이 되기 위해 노력할 뿐, 다른 예능프로그램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혹은 다른 예능프로그램을 가르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단정할 수 없다고 해서 <무한도전>이 지금의 예능생태계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분명히 <무한도전>과 다른 예능프로그램들 사이에 뭔가 일어나긴 했다. 단지 직접적인 교수-학습의 방식이 아닐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무한도전>의 역할은 교수자라기 보다는 자극제에 가까웠을 것이다. “아 저거 재밌다, 이렇게 응용해보면 좋을 텐데정도였을 거라는 뜻이다. 여기서 <무한도전>이 하는 일은 예능이 어때야 한다거나 어떤 포맷이 어떤 효용이 있다거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90분을 통해 일종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2008년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배트맨: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말한다. “이건 메시지를 보내는 거야 It’s about sending a message” 이 대사를 시작으로 조커가 저지르는 일련의 범죄들은 영화의 배경인 고담시의 시민들로 하여금 조커에 대한 공포심을, 그리고 치안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학습하게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교육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학습은 이뤄진다학자들은 무형식학습informal learning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런 종류의 학습을 설명한다무형식학습은 거칠게 정의하자면학교나 학원과 같은 교육기관 바깥에서즉 교육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지는 학습을 의미한다수업을 듣는 것만 학습이 아니라 친구들과 카페에서 수다를 떨거나혼자서 게임을 하거나 하는 모든 일상의 경험이 무형식학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통적인 교육학, 특히 수업장면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학에서 학습과 한 쌍을 이루는 것은 교수teaching’이다. 학습자의 수준과 흥미를 파악해서 적절한 교육 컨텐츠를 적절한 방법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전달하는 것이 교수의 핵심일 것이다. 하지만 무형식학습은 교육/성장의 장면에서 이 의도성을 지워버린다. 정확히 말하면 의도가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니다. 단지 그 의도가 상대방을 성장시키겠다거나 가르치겠다는 노골적인 교육목표가 아닐 뿐이다. ‘웃기고 싶다는 목적으로 구성한 프로그램이 누군가를 웃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경험을 자극해 성장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예능프로그램이 던지는 메시지, 자연재해가 던지는 메시지, 과학적 발견이 던지는 메시지, 누군가와 게임을 할 때 받는 메시지,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 나누는 메시지 등등 온갖 메시지들이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환경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 다양한 메시지들은 모두 무형식학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대중문화컨텐츠가 교육학의 논의에 있어 가지는 가능성도 여기에 있다. 대중문화는 그 컨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그것도 아주 풍부한 메시지를 던진다. <무한도전>이 던지는 메시지는 앞에서 논한 예능프로그램의 형식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무한도전>나비효과특집을 통해 기후변화와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드러냈고, ‘Rowing’ 특집에서는 조정이라는 스포츠를 통해 멤버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공동체와 신뢰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던져주기도 했다.


나비효과 특집(2010)


Rowing 특집 (2011)



또한 <무한도전>은 메시지를 보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받는 것에도 적극적이다. <무한도전>이 다른 예능프로그램들에 영향을 주는 만큼, <무한도전> 역시 영향을 받는다. <자기야>의 한 코너인 그랬구나무한상사특집에 반영되어 큰 웃음을 만들어냈으며, <>짝꿍특집으로, <나는 가수다>나름 가수다<무한도전> 안에서 재탄생했다


<자기야>의 '그랬구나'와 <무한도전>의 '그랬구나'는 사뭇 다르죠



그리고 <무한도전>의 캐릭터들은 연기자와 시청자, 그리고 연출자가 상호주관적인 맥락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공동창조물이다. 캐릭터는 연기자가 어떤 말/행동을 했을 때, 연출자가 편집과 자막 등을 통해 1차적인 해석을 붙이고, 거기에 시청자들의 반응과 평가, 때로는 패러디 등의 2차 저작이 결합되면서 만들어진다. 캐릭터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특징 덕분에 <무한도전> 안팎에서 오가는 메시지의 밀도가 빽빽해지는 것이다


자막은 캐릭터에 대한 연출자의 1차 해석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한도전>은 종종 시청자들을 직접 프로그램 안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한다. /오프라인 앙케이트는 <무한도전 퀴즈의 달인> 시절부터 <무한도전>의 핵심요소 중에 하나였으며, ‘타인의 삶특집에서는 시청자와 연기자가 하루 동안 인생을 바꿔서 살아간다. 이 외에도 어떤 미션을 수행할 때, 멤버들이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하는 것도 아마 시청자들과의 스킨십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무한도전>은 다른 예능프로그램들 뿐만이 아니라 시청자들까지도 그 진화의 과정에 끌어들인다. 그 공진화 안에서 <무한도전>이 던지는 메시지가 시청자들에게 무형식학습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시청자들이 보내는 메시지가 <무한도전>의 변화에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요즘엔 멤버들이 운전도 많이 하지만



<무한도전>7년에 걸쳐 이룩한 역사, 예능프로그램 진화의 역사는 바로 이렇게 고정된 형식성을 탈피하고, 열린 텍스트로서 메시지의 송수신에 적극적인 <무한도전>의 지향에 의해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 온갖 제도들을 떠올릴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학교나 학원으로 대표되는 제도로서의 교육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제도는 틀을 구획하고 온갖 구체적인 것들을 시시콜콜 규정하는, 일종의 닫힌 텍스트이다. 그게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열린 텍스트라는 것은 그만큼 위험에도 열려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열어둘 수는 없을까, 학교로 대표되는 제도교육의 경계를 조금 더 말랑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제도와 별개로 우리의 상상력만큼은 분명히 열어둘 필요가 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배움과 성장의 기회는,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메시지는 사방 천지에 널려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기회가 아니라 그 배움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점/상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