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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잉여의교육학

이 시대의 이방인, 대학원생














<교육공동체 벗>에서 내는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2013년 1,2월호)에 기고한 글

 


이 시대의 이방인, 대학원생

<두 이방인>과 대나무숲에 그려진 대학원생의 초상


 

대학원생으로 2년 반을 살았지만 유독 2012년 하반기에는 대학원생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가장 큰 계기는 아마도 10월에 터진 교수 집 개밥 주는 대학원생논란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에서 대학원생 인권 실태를 조사·발표한 뒤, 교수들의 사적인 업무와 인권침해에 시달리는 대학원생들의 처지에 사회적 관심이 모아진 시기였다.


하지만 그 열기도 잠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며 대학원생 이슈는 사회적 관심에서 다시 멀어졌다. 이번 대통령 선거가 유독 정책 이슈 없이 인물 중심으로 전개되어서이기도 하지만, 지난 총선이나 대선을 돌이켜 봐도 애초에 대학원생은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 굳이 제도 정치까지 갈 필요도 없다. 과장을 좀 보태서 말하자면, 대학원생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가정에서는 남들보다 등록금은 몇 년 더 내면서 밥값은 못 하는 철부지, 친구들 사이에서는 취직을 안() 해서 출근도 하지 않는데 바쁜 티는 있는 대로 다 내는 밉상, 노동시장에서는 애매하게 학력만 높고 실무력은 모자란 애물단지이기 때문이다.



 

두 이방인과 대나무숲에 비친 대학원생의 모습


그래서일까. 대학원생을 이방인stranger이라 호명하는 이들이 있다. MBC 코미디에 빠지다의 한 코너인 두 이방인은 박사과정 대학원생 두 명이 중심이 되는 짧은 상황극이다. 매 회마다 주어진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대개 다음과 같은 구조를 이룬다.


서로를 김 박사와 조 박사라 부르는 두 명의 대학원생이 연구실 바깥에서 만난다. 만나자마자 둘은 교양이 묻어나도 너무 묻어나는, 그러니까 재수 없는 말투로 대기업에 면접 보고 온 얘기, 혹은 자신들이 쓰는 논문 얘기를 한다. 그런데 그 논문이라는 게 참 웃기다’. 예를 들면, ‘행정기관의 명의 도용 및 인권침해에 대한 연구랍시고 왜 행정기관의 모든 예시 서류에는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냐는 문제를 던지는 식이다. 여기에 대고 서로 칭찬이랍시고 예의 교양 있는, 그러니까 느끼한 말투로 “Nice 매의 눈(통찰력이 좋다는 뜻)”이라든가 뭔가 있어 보이는 영어 단어를 내뱉기도 한다. 그렇게 자기들끼리 스펙이 어떻다느니 우리 같은 고학력자들에게 청년 실업은 남의 일이라느니 하면서 수다를 떠는 모습에 손발이 오글거릴 때쯤, 3의 인물이 등장한다. 때로는 공사 현장의 소장, 때로는 농장 주인, 때로는 어시장의 어부로 나타나는 이 사람은 바로 오늘의 고용주, 즉 오늘의 갑이다. 갑은 손에 흙 한번 안 묻혀 본 것 같은 이 고학력자들에게 소위 말하는 막노동을 시킨다. 대개는 큰 설명이 필요 없는 단순한 일이다. 그런데 이 박사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될 일에 우리가 가진 재능과 지식을 통해 이 난관을 극복해 보자느니 그게 지식인의 도리라느니 하면서 굳이 머리를 쓴다. 결과는? 설명하기도 우습다(유투브에서 볼 수 있다). 도무지 말만 많고 도움은 전혀 안 되는 이 박사들에게 갑은 집에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이방인들은 갑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한다. “해야 합니다. 지금은 해야 합니다.” 

 

 


어지간하면 뭐 저런 무능한 선비 같은 인간들이 다 있냐는 생각을 하며 웃어넘길 수 있을 텐데, 하필 나는 대학원생이어서 마냥 웃기가 어렵다. ‘두 이방인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 시대 대학원생의 모습은 초라하다.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유머랍시고 낄낄대고, 배추 하나도 제대로 못 옮기면서 외국계 기업에서 모시러 오겠지라느니 통찰력 대단하다느니 서로 띄워 주고 있는 걸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클래식이니 법조문이니 읊어 대는 얘기를 들어 보면 뭔가 유식해 보이긴 하는데 막상 일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배웠다는 분들이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먹느냐는 갑의 호통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렇게 두 이방인에는 유식하지만 정작 생활인으로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가 대학원생을 바라보는 한 전형이 드러난다.


그래도 두 이방인에 나오는 대학원생들은 최소한 자기들끼리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어쨌든 자신들이 지식인이라는 것에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현실의 대학원생들에게는 이 자부심조차 없다. 물론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마다 처지와 사정이 다르니 모든 대학원생들이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2012년 하반기 트위터를 달군 대나무숲[각주:1]을 통해 드러나는 대학원생들의 자기 인식은 자부심보다는 열패감에 가깝다. 인문사회계 대학원생들이 공유하는 우골탑 옆 대나무숲계정의 트윗 몇 개를 옮기면 이렇다.




 

이 외에도 많은 글에서 가족에 대한 미안함, 미래에 대한 불안감, 교수나 대학원 시스템에 대한 불만, 얼른 탈출하고 싶은 심리 등을 엿볼 수 있다. 한 조사에서는 서울대 대학원생의 20%, 5명 중의 1명이 우울증 증세를 겪고 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대학원생들은 답답하고 무능하거나(두 이방인) 불안하고 우울한(대나무숲)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모든 이의 불안과 그/녀들의 불안


물론 시대정신이 불안인 사회에 그 누가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누가 더 불행하냐며 불행을 경쟁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이만큼 불행하니까 더 불행한 사람들 처지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면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옆에서 토닥토닥,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것도, 소위 말하는 멘토들의 힐링에도 한계가 있다. 국면의 전환을 위해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불행이 힘들어요, 아파요이상으로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는 작업이다. 개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 더해 고통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이해로부터 돌파구가 나올 수 있다.


대학원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30, 아니 1시간이라도 쉬지 않고 떠들 수 있다. 굳이 이 문제에 천착해 고민해 온 사람이 아니라 아마 길 가는 대학원생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줄줄 나오리라 생각한다.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대학원생들이 왜 고통받는지, 그 구조적 문제가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우리 사회에 공유되어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지금 대학원생들의 처지에 대한 논의가 보편적으로 보장받아야 하는 인권의 차원 노동 시간, 노동 환경, 임금, 건강, 존엄성 등 에 한정돼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인권의 문제는 중요하며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보편적 인권 보장과 다른 층위에서, 즉 한 사람이 그냥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대학원생이기 때문에/녀들의 처지가 가지는 특수한 의미이다. 나는 대학원생들의 열악한 처지와 그로부터 기인하는 열패감, 그리고 두 이방인을 통해 드러나는 대학원생에 대한 인식은 이 사회에서 지식인이 가지는 위상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인, 대학, 그리고 대학원생


지식인의 위상이라고 운을 떼었지만, 2012년을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 지식인 담론이 유통되고 있기나 한지 의문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지식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리영희, 조한혜정, 강준만, 진중권 같은 네임드named’들보다 네이버 지식인을 먼저 떠올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지식인 하면 네이버 지식인이 먼저 떠오르는 상황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2008년에 출간된 민주화 20, 지식인의 죽음에 따르면, 예전에 지식인의 역할은 전문성에 근거해 미래를 전망하고, 사회 변화에 따른 목적 부재의 아노미를 방지하기 위해 선도적으로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책의 저자들은 87년 체제 출범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변해 왔다 지적한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지금, 더 이상 저항적/입법적 지식인은 찾아보기 어렵고 체제의 부속물에 가까운 전문적지식인만 남았다고 분석한다.



지식인, 보다 좁게는 학자/교수들이 일종의 기술자가 되었다는 비판은 대학의 기능/역할 변화와 연결된다. 대학이 자유로운 논쟁과 비판 정신을 상징하던 시대는 진작 끝났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급격하게 대학의 수가 늘어나고, 대학들 사이에 국제 수준의 경쟁까지 시작되면서 대학은 점점 지식을 찍어 내는기관으로 변해 왔다. 교수들에게는 형식성이 엄밀하게 지켜지는 논문중심의 연구 업적이 강요되고, 산학 협력이라는 빌미로 기업의 돈이 대학에 들어오며 경쟁 중심의 시장 논리가 대학, 그 안에서도 교수teaching보다 연구research가 중심이 되는 대학원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굳이 기업의 지원뿐만 아니라 국가의 지원도 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교육부의 대표적인 연구비 지원 사업이었던 BK21 사업의 경우, 철저하게 논문의 양으로 교수들과 학과의 업적을 평가해 개별 논문의 질 저하, 그리고 논문의 형식에 맞지 않는 담론의 유통을 가로막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학자/교수들이 비판적 지성으로서 지식인의 역할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이들이 하는 일이 비슷비슷한 형태의 지식을 찍어 내는 것, 그래서 (과장을 보태)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는 정보/지식을 만들어 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면, 네이버가 지식인이라는 개념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도 꼭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각주:2]. 


지식인이 전지현 때문에 뜬 게 아니라능...


대학원은 교육기관으로서 근대 학교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지식 생산이 이뤄지는 노동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금의 대학은 예전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공장에 가까워졌다. 교수들이 대학이라는 거대한 지식 공장의 개별 생산 라인을 담당하는 매니저라면, 대학원생들은 그 생산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그래서 교수는 스승인 동시에 관리자, 상사이다. , 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는 스승 - 제자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상사 - 부하 직원의 관계이기도 하다. 때로 전자보다 후자의 관계가 더 두드러질 때, 교수들은 대학원생들의 실수나 낮은 성취에 대해 가르침이 아닌 혹독한 비판만을 던진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원생들의 자존감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직 검토도 받기 전의 자기 아이디어나 논문을 너무도 쉽게 쓰레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페이스북이고 트위터고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안 될 거야혹은 망했어요의 정서가 팽배하다. 워낙 까이는 게 일상이다 보니 대학원생들이 긍정적인 피드백을 갈구하는 모습은 #whatshouldwecallgradschool같은 사이트에서 풍자의 단골 소재이다



그리고 어디서나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대학원생들은 (교수도 때에 따라 을이기에) ‘of 로서 온갖 부조리를 떠안는다. 이렇게 고생해서 학위를 딴다고 해도 눈앞에 펼쳐지는 가장 가능성 있는 미래는 비정규직 시간강사이다. 대학원 바깥에서는 두 이방인의 박사들처럼 무능한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데, 그나마 비슷한 부류가 모여 있는 대학 안에서도 딱히 좋은 대접은 못 받고 심지어 미래도 불안정하니 대학원생들의 평균적 멘탈이 쿠크다스인 건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다.


이런 조건에서 학문 후속 세대인 대학원생들이 학습하는 것은 부조리에 대한 침묵, 냉소적인 태도, 그리고 열패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문제지만) 20년 뒤가 두렵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교수나 학자들이 주로 소비되는 방식이 멘토기술자에 가까워서 그렇지 잘 찾아보면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의식하고 있는 교수들도 꽤 많다[각주:3]. 그들이 대학원에 다녔을 때는 아직 지식인들이 비판적 지성으로서 자기 역할을 하던 시기였으니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010년대, 대학원생들이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는 지식인의 모습은 윤리 의식마저 희미해 보이는 공장의 중간 관리자에 가깝다. 롤 모델이 이러하니 지금의 대학원생들이 나중에 학위를 가진 전문가로서 지식인의 역할을 요구받았을 때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때쯤엔 지식인의 위기나 몰락이 아니라 지식인의 멸종이라는 얘기가 오갈지도 모르겠다.


 

돌파구는 어디에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위상이 쓸데없이 높다는 평가도 있고, 언제부턴가 집단지성이 주목받고 있긴 하지만, 새로운 의제를 던지고 사회의 규범을 만들어 가는 이로서 지식인에 대한 요구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학원은 지식인이 배출되는 가장 일반적인 통로이다. 지금 대학원생들의 고통, 그리고 그/녀들의 처지에 주목하는 것은 보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지식인 양성 체제와 관련된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문제에 대한 대책도 한 명 한 명의 고통을 구제하는 것을 넘어 좀 더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전망 아래, 말하자면 학문 정책이라는 틀 안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2012년 치렀던 두 번의 중요한 선거에서 어떤 정치 세력도 학문 정책이나 대학원생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았다. 대학원생을 이방인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그/녀들이 자기들끼리 통하는 알아먹지 못할 얘기에 낄낄대거나 현실적으로 무능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학원생들은 두 이방인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이방인이어서가 아니라, 대나무숲의 가슴 아픈 현실을 끌어안고 사는 소외된 존재로서의 이방인이기 때문에 아프다.

 


글을 마무리할 때 굳이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을 이 글에서만큼은 내려놓는다. 대학원생들의 처지가 심각하게 절망적이어서가 아니다. 절망은 출구조차 없을 때 찾아온다. 그래도 여기는 출구는 있다. 다들 자기 나름의 출구를 찾는다. 다만 출구와 돌파구는 다르다.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출구가 아닌 돌파구가 필요하다. 다행히 가능성은 열려 있다. 알 사람들만 알던 대학원의 현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에서는 대학원생들이 자치회를 결성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아마도 멀지 않은 시일에 누군가는 돌파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글을 맺는다.

 

 

 

 

  1. 2012년 9월 트위터에는 ‘출판사 옆 대나무숲’을 시작으로 동종업계 종사자들의 뒷이야기, 애환을 공유하는 ‘대나무숲’ 계정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약 한 달 정도 신드롬이 이어졌지만 10월 하순에 보수(라 쓰고 꼴통이라 읽는) 성향 포털 사이트인 ‘일간베스트 저장소’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많은 대나무숲이 사라졌으며, 지금은 겨우 몇 개가 살아남아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본문으로]
  2. 그런 점에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ctrl+c, ctrl+v’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세태에 대한 비난은 누구를 향해야 하는 건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학생들의 책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과연 그/녀들이 ‘웹 공간의 지식인’을 통해 ‘복사+붙여 넣기’ 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글을 쓸 수 있도록 배울 기회가 있었는지, 가르치는 자들은 과연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는 건지. [본문으로]
  3. 내가 대학원 생활을 함께 보낸 사교육 관련 연구 프로젝트의 책임 교수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냥 듣기에 사교육은 이제 별로 보탤 말도 없을 것 같은 주제지만 접근하는 관점이 흥미로워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어느 날, 어째서 이 프로젝트를 하냐는 질문에 그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대답했다. “사교육(입시 사교육이 아니라 성인교육 영역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사교육), 특히 기업 수준의 사교육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미리 연구를 통해 담론 지형을 형성하고 그 시장에서 통용될 규범을 제시해 놓지 않으면 결국 자본의 논리가 사교육을 지배할 것이다. 그게 지식인의 역할 아니겠나.” 아직 프로젝트는 종료되지 않았고, 교육 기업이 융성하는 미래가 오지도 않았으니 이 판단의 옳고 그름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바로 그가 스스로의 작업을 대하는 태도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