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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잉여의교육학

관계맺음 안에서의 성장: <건축학개론>














<교육공동체 벗>에서 내는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2012년 9,10월호)에 기고한 글

 


관계맺음 안에서의 성장

<건축학개론>으로 짚어보는 연애와 교육




 


주의 : 이 글은 영화 건축학개론내 아내의 모든 것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 가장 화제가 된 영화는 어벤져스이다. 어벤져스는 이전에 이미 다른 작품들을 통해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영웅들을 한 화면에 모아 놓은 만큼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며 압도적인 흥행 1위를 달성했다. 어벤져스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대개 화려한 CG와 액션 신을 이야기하며 후속편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곤 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관객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의이야기를 꺼내게 만든 영화가 있다. 바로 건축학개론이다. 건축학개론을 보고 나온 관객들은 트위터에,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신의 추억담을 늘어놓았다. 이 영화의 저력은 영화 자체의 서사가 가진 완결성이나 배우들의 연기라기보다는 관객들을 각자 자신의 기억 속에 담긴 시공간으로 날려 버리는 장치들을 절묘하게 배치한 데서 나온다. 젊은 배우 네 명과 이제 갓 두 번째 작품을 연출한 (나름) 신예 감독이 그려 낸 이 기억의 습작은 그렇게 일종의 신드롬을 일으키며 한국 멜로 영화 흥행 역대 1위를 기록했다.


인류 최대의 관심사는 연애라는 얘기가 있듯이 연애 관계를 중심에 두고 서사를 전개하는 작품은 계절이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항상 넘쳐 난다. 건축학개론은 그 수많은 연애의 양상 중에서도 첫사랑, 그리고 그 첫사랑에 대한 기억/회상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첫사랑 : 우리가 처음을 대하는 자세


처음이 가지는 의미는 복합적이다. 두렵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한다. 아마도 첫 경험, 첫 시도가 두려운 이유는 그 결과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고, 그럼에도 첫 경험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동경하던 무언가에 대해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이 주는 두려움도, 기대도, 결국에는 그 경험이나 대상에 대한 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서 알지 못할 때, 그런데 어떤 동기에 의해 그것을 알고 싶을 때, 우리는 질문을 던진다.

 

승민 : 너 고향이 어디야?

서연 : 제주도.

승민 : 그러면 부모님은 계속 제주도에 계시고?

서연 : 아빠는 거기 계셔. 엄만 돌아가셨고.

 

과제 같이 하자고 한 것도 서연, 노래 들려준 것도 서연, 첫 눈 얘기 꺼낸 것도 서연, 승민인 뭐했니 


같이 건축학개론 강의를 듣는 승민과 서연은 우연찮게 함께 과제를 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 간다. 소개팅에서도 그렇듯이 두 사람은 나이부터 시작해 가족 관계까지 호구조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함께 보내는 시간과 공유하는 경험이 점점 늘어날수록, 동사무소 서류로는 확인할 수 없는 서로의 취향이나 성격을 알게 되고, 또 그에 익숙해진다. 이런 종류의 은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1+1=2’라거나 조선은 이씨 왕조이다와 같은 지식과는 성격이 다르다. 다시 말해, ‘케바케case by case’인 것이다.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며 쌓아 가는 앎의 성격이 교과서적인 지식과 다르다는 것은 건축학개론의 감초 캐릭터인 납뜩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납뜩이는 승민이 서연과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 관계가 끝날 때까지 모든 과정에서 승민에게 조언을 던지는 친구이다. 승민이 서연과 관계를 쌓아 가며 가졌던 궁금증은 그냥 서연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승민이 원하는 관계는 기존의 친구 관계와는 다른, 우리가 연애라고 부르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승민은 서연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궁금할 뿐만 아니라, 서연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도 궁금하다.


그래서 승민은 친구 납뜩이를 찾아간다. 우리가 무언가를 모를 때, 우리는 직접 질문을 던질 수도 있지만 이렇게 조언을 구할 수도 있다(굳이 정색하고 할 얘기는 아니지만, 연애도 사실 이렇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알기 위해 능동적으로 스스로의 학습을 조직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서, 알고 싶어서 한 행동이 꼭 의도한 대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납뜩 : 일단 소주 한 병을 사. 그리고 걔네 집 앞에 가는 거야. 가서 소주를 병나발로 딱 불고 전화를 해, 받잖아? 그럼 집 앞이다. 잠깐만 나와하고 그냥 끊어 딱.

승민 : 그냥 끊어?

납뜩 : 그냥 끊어. 그럼 사람이 굉장히 궁금하게 돼 있어. 갑자기 왜? ? 이러면서 나오게 돼 있다고.

 

승민의 눈에 납뜩이는 연애 박사이다. 실제로 독서실의 싱숭이와 연애를 하고 있기도 하고, 이렇게 연애에 관련된 조언을 술술 던지는 걸 보면 납뜩이는 연애 전문가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납뜩이가 얘기한 방법은 정작 승민의 성격에 별로 맞지 않는 것은 물론, 아마도 (짐작컨대) 서연에게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너만 믿는다, 같은 느낌이죠 


소위 연애 전문가인 납뜩이의 조언이 이렇게 미끄러지는 이유는 바로 납뜩이가 경험한 사람들과 승민, 그리고 서연이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연애나 관계 맺음의 달인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대량생산 안드로이드가 아닌 한 그 전문성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타자와의 관계 맺음은 고정된 체계 안에서 답을 찾는 문제(예컨대 인수분해), 여러 번 반복해서 익숙해지는 기술의 숙련(예컨대 공예)과는 다른 방식의 앎을 요구하는 것이다. 역시 올해 상반기 흥행작 중 하나인 내 아내의 모든 것에는 모든 사람을 유혹할 수 있는 카사노바 캐릭터가 등장한다. 하지만 정작 그 카사노바도 주인공에게 선택받지는 못한다. 주인공은 지금까지 그가 만났던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 작품이 아니어도 연애 관계에서 정석을 따르다가 발생하는 이런저런 해프닝은 많은 로맨틱 코미디나 시트콤의 소재가 되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유사성에 의해 연애의 매뉴얼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매뉴얼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들은 때로, 아니 꽤나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답을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렇게 확실하고 객관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쌓아 간다는 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혹은 사귀어 온 사람에게서도 문득 낯선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으며, 그 낯설음은 우리가 처음에 경험하는 무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무지를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직접 물어보는 것이다. 요즘 온라인 게시판에 넘쳐 나는 연애 상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게 왜 남들에게 물어볼 일인가 싶은 내용들이 꽤 많다. 그렇게 제3자들의 판단에 기대는 것은 서로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애거나 미룸으로써 오히려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판단이지만 인간관계에서 궁금한 점을 직접 물어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의 첫사랑이 비극적으로 끝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서연에게 직접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서연의 감정을 직접 듣는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5년이 흐른다.


 

기억과 회상 : 과거의 재해석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의미


영화의 첫 장면은 주인공들이 처음 만난 15년 전이 아니라 현재의 승민을 비춘다. 이런 편집은 의미심장하다. 건축학개론은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과 그 결과, 과거 현재로의 진행에 따라 서사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중심을 두고 회상을 통해 과거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현재 과거의 반복이라는 전개 방식을 택한다. 그렇기에 건축학개론은 그냥 첫사랑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첫사랑을 회상하는 영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 영화가 관객들을 각자의 추억 속으로 날려 보내며 천의 서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데는 아마도 이런 서사 구조가 한 몫 했을 것이다.


15년이 지나 서연이 집을 지어 달라며 승민을 찾아왔을 때, 승민은 서연을 첫눈에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 서연이하던 승민에게 서연은 잘 기억도 안 나는 사람이 되었다. 승민의 약혼녀의 입을 빌리자면, 재회 이전의 승민에게 첫사랑(=서연)의 의미는 썅년이었다.

 

서연 : 그 첫사랑, 그 썅년이 나냐고.

승민 : , 아냐 너 아냐, 너랑 나가 뭐가 있었다고.

서연 : 그치? 나 아니지? 근데 왜 그게 나 같지. 그 썅년이. 참 이상하네.

 

15년이 지나도 투닥투닥


하지만 이 썅년의 이미지는 재회 이후 변하기 시작한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둘 사이에는 질문과 대답이 오가고, 조금씩 서로 간에 비어 있는 15년이 채워진다.

 

승민 : 널 잘 알아야 너한테 맞는 집을 잘 지을 거 아냐?

서연 : , 그러니까 나를 잘 알고 싶으시다 이거네. 내가 궁금하시다?

 

승민에게 첫사랑의 이미지가 나빴던 이유는 매몰차게 서연에게 이별을 선언했던 그 상황에 대한 아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연과의 재회 덕분에 승민은 이별의 아픔 이전에 경험했던 달달한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서연 역시 마찬가지다. 서연에게 첫사랑은 아마 첫눈 오는 날의 눈물로 기억되고 있었겠지만 승민과의 재회를 통해 즐거웠던 추억과 풋풋한(?) 감정이 살아났을 것이다. 그러한 추억들은 바로 눈앞에 있는 첫사랑의 상대, 자신의 감정이 보상받지 못했던 동경의 대상과 어우러져 둘 사이의 묘한 긴장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집이 완성되어 현재의 이별을 앞둔 시점에서 승민은 15년 전 자신이 서연에게 고백하기 위해 준비했던 집 모형을 서연의 집에서 발견한다.

 

승민 : 왜 나를 찾아온 거야?

서연 : 네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어. 왜냐면…… 네가 내 첫사랑이니까.

 

이제 승민과 서연에게 더 이상 첫사랑의 기억은 썅년이나 첫눈 오는 날 흘렸던 눈물이 아니다. 과거의 경험에 부여하는 의미가 재회와 교감이라는 현재의 사건을 통해 달라진 것이다. 물론 그런 의미의 변화가 있다고 해서 주인공들의 삶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서연은 원래 계획대로 제주도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고, 승민은 약혼녀와 결혼해 미국으로 떠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승민이 보내온 소포는 그 시절의 좋았던 추억을 오롯이 간직한 기억의 습작을 서연에게 돌려준다. 이제 이 두 사람에게 첫사랑의 기억은 아픔이라기보다는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 갈 때 내 마음속으로 쓰러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전람회, 기억의 습작) 위안을 줄 수 있는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15년 뒤에 어떻게 기억될까 


이렇게 우리가 과거의 경험에 부여하는 의미는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그 변화는 우리에게 때로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 저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연설에는 잡스의 대학 시절 얘기가 언급된다. 그는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졸업하는 것에서 별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고 중퇴를 결심한다. 그러고는 전공과 관계없는 강의들을 몇 개 찾아 듣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서체와 관련된 강의였다. 그 강의에서 들었던 내용은 훗날 잡스가 매킨토시를 개발할 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잡스가 매킨토시를 실제로 개발하기 전까지는 대학 중퇴를 결심하고 방황하던, 그리고 그 강의를 들었던 경험의 의미는 조금 달랐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과거의 경험에 부여하는 의미, 또 그 경험이 우리의 성장에 가지는 잠재력은 앞으로 삶에서 무엇을 마주치느냐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장의 자극이 될 수 있는 경험은 꼭 완전히 생소한 경험일 필요는 없다. , 사람이 평생에 걸쳐 학습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과 첫 경험을 지속적으로 쌓아 가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에서만큼이나 과거의 경험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도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승민에게 서연과의 재회가 첫사랑의 기억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그리고 그를 통해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듯이 현재의 어떤 변화들이 계기가 되어 과거의 경험을 재해석하고,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성장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만큼이나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해 성찰하는 방법을 익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연애와 교육?


연애가 가지는 교육적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타자와의 깊숙한, 그리고 배타적인 관계 맺음은 스스로를 얼마나 내보일 수 있느냐와 연관된다. 그런 점에서 연애는 자기 성찰의 좋은 기회가 된다. 혼자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자신의 모습이 오히려 타자와의 연관 속에서 우연찮게 드러나고 성찰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연애는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한 을 쌓아 가는 과정이다. 앞서 정리했듯 다른 사람에 대한 앎을 쌓아 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처음의 자세로 돌아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보다 섬세하게 앎에 접근하는 자세는 한 명 한 명과의 인간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지식과 통찰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좋은데 도움이 되겠니 안되겠니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렇게 중요한 성장의 기회를 금지하고 통제하기에 급급하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10대의 연애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연애가 교칙으로 금지된 학교도, 원생들끼리 사귈 경우 퇴원시키는 학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강제퇴원사유가 '남녀대화' 근데 동성커플은 어쩔?


그러나 연애를 통제하고 금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육의 관점에서 지지하고 지원할 수는 없을까? 학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막아 버리기에는(이것도 사실인지 잘 모르겠다) 그 관계가 가지는 성장의 가능성이 너무 아쉽다.


헐 박사장님




<건축학개론> 관련 이미지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88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