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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잉여의교육학

김연아 교생실습 논란 다시 읽기





<교육공동체 벗>에서 내는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2012년 7,8월호)에 기고한 글



김연아 교생실습 논란 다시 읽기

개인에 대한 응징이 아닌, 학교의 역할에 대한 고민으로




나에게 5월은 교생실습의 추억이 있는 달이다. 내가 직접 교생실습을 갔던 건 벌써 3년 전이지만, 올해는 우연찮게 마침 5월에 교생 때 교과 지도를 맡아 주셨던 선생님을 뵐 기회가 생겨 오랜만에 추억을 되새기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님을 뵙고 며칠 지나지 않아 갑자기 교생실습이 포털 사이트 검색어에 오르는 등 사회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해도 뉴스가 나온다는 스타, 김연아 선수 때문이었다.


소위 김연아 교생실습 논란의 전개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514, 프레시안에 김연아 선수의 맥주 광고 출연을 비판하는 칼럼이 실렸다. 이 칼럼의 요지는 김연아 선수의 청소년에 대한 영향력과 그녀가 교생실습 중이라는 점을 근거로 맥주 광고 출연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칼럼의 말미에서 교생실습은 제대로 하고 있냐며 처음으로 특혜에 대한 의심이 제기됐다. 일주일 뒤인 521일에는 동일한 필자가 아이유와 김연아, 누가 진짜 바보인가?라는 제목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가수 아이유의 선택을 높이 평가하고 김연아 선수를 편법적 대학 생활의 사례로 거론하며 대학에 진짜 배움이 없음을 비판했다. 사실 이 두 개의 칼럼에서 이미 이번 논란의 중심이 되는 논리들은 거의 등장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전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522일의 라디오방송이었다. 한 대학 교수가 김연아 교생실습은 쇼라는 등 상당히 노골적인 표현을 사용해 특혜/편법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포털 사이트는 관련 기사로 도배됐고 전 국민이 조사원이 되어 김연아 선수의 대학 생활과 교생실습을 파헤쳤다. 그 와중에 김연아 선수의 매니지먼트 회사가 라디오방송에 출연한 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며(530) 논란은 절정에 달했다. 그 상태로 진흙탕 싸움이 2주 정도 이어진 뒤, 결국 614일에 김연아 선수 측에서 고소를 취하하며 소위 김연아 교생실습 논란은 종결되었다.


이 아저씨는 좀 심각하긴 했죠



이렇게 이 논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굉장히 컸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가 숙성시킨 논의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사실 이번 논란은 김연아 선수라는 전 국민적 스타가 그 중심에 섬에 따라,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김연아 선수의 구체적인 행동, 혹은 발언 이상으로 확장되기 어려웠다. 특히 김연아 선수의 매니지먼트가 명예훼손 고소라는 대응을 취한 순간 논란의 초점이 급격히 피소된 교수와 김연아 선수 사이의 선정적 갈등 양상으로 이동하면서 언론에서도 이 문제를 운동선수 양성 과정 혹은 대학 교육과 관련된 논의로 이어 가지 못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보다 더 답답했던 것은 그 과정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지배적 교육 담론이 갖는 후진성이다.



네가 책임지고 끝내자?


김연아 선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대학 생활의 충실함이라는 용어를 동원한다. 여기서 대학 생활의 충실함이란, 대학에서 몇 개의 강의를 들었고, 출석은 얼마나 했고, 그래서 성적은 얼마를 받았고 등을 의미한다. 김연아 선수는 학교 안에서 정해진 교육과정을 성실하게 이수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졸업장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교육과정 이수와 관련해 과연 김연아 선수가 모든 비판을 떠안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팅 특기를 인정받아 입학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고려대학교는 김연아 선수의 교육을 위해 코치, 안무가 등 피겨스케이팅 전문 인력을 학교 교직원으로 채용하거나 한국으로 불러오지 않았고, 김연아 선수가 훈련하는 데 필요한 빙상장을 확보해 두지도 않았다(공용 빙상장만 존재). 사실 고려대학교 입장에서는 피겨스케이팅 특기로 입학한 학생이 처음이고 앞으로도 많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이런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상황이 이렇다면 학교가 학생의 배움에 적합하지 않은 교육과정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학생이 자신의 배움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도록 제도를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이렇게 초점을 불성실한 김연아에게서 부실한 교육과정으로 옮기면, 이 문제는 김연아 선수라는 한 개인이 아닌 제도의 영향을 받는 모든 (잠재적) 학생들의 것이 된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는 교육 체제의 구조적 결함에 의해 발생한 문제의 책임을 개인이 감당하는 식으로 덮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학교폭력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학교폭력은 야만적 구조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문제임에도 현장의 대응은 이른바 일진들을 제거하는 형태로만 이뤄지기 십상이다. 학생들이 자꾸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그에 대한 대응은 훈화를 통한 구성원들의 정신교육창문을 여는 행위에 대한 통제로 수렴된다.



무려 대구교육청 '공문'


당연히(!) 이번 논란에서도 교육 체제보다도 김연아 선수를 향한 응징의 정서가 강하게 표출되었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교수들은 김연아 선수 개인이 아니라 교육 체제 전반에 관한 비판이었다고 반복해서 강조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던져 놓은 언어에선 그런 비판보다 김연아 선수에 대한 분노나 조롱이 더 강하게 읽힌다. 많은 사람들도 기사 댓글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트위터에서 김연아 선수의 교생실습이 무효라느니, 졸업 자격 박탈이 필요하다느니 하는 말을 쏟아 대며 응징을 요구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김연아 선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들 중에 최선을 선택해 온 것일 뿐, 문제의 핵심은 제대로 된 준비 없이 피겨스케이팅 특기생을 받아들인 고려대학교의 태도, 나아가 한국 사회의 기형적인 운동선수 양성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보다 미래지향적인 방향은 교육 체제 자체가 가지는 한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김연아 선수의 국내 체류 시간이라든가 수업의 몇 퍼센트를 보고서로 대체했다거나 하는 숫자들을 밝혀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번 논란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한국 사회 교육 체제의 문제를 분석하고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교육 담론을 구성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시야는 과거 - 현재의 김연아 개인으로부터 현재 - 미래의 수많은 학생들로 확장되어야 한다.



학교 안에 갇힌 교육, 학교를 가두는 교육


이번 논란에서 김연아 선수에게 불성실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답답했던 이유 중 하나는 김연아 선수가 학교 바깥에서 체육(교육)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김연아 선수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성장하기 위해 남들보다 몇 배나 되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이게 노는 거임?


많은 사람들이 CF나 방송 프로그램 출연을 근거로 김연아 선수의 불성실을 지적하지만, 매체에는 잘 노출되지 않는 김연아 선수의 무지막지한 훈련 시간, 체육계 인사로서 활동한 시간에는 교육과 배움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서 배움이란 결국 학교의 담장 안에서, 혹은 학교의 교육과정에 승인될 수 있는 형태로만 가시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레 누군가가 무언가를 배웠음을, 혹은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느 학교 무슨 과를 나왔다는 식으로 학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 배움과 교육의 표상은 학교가 거의 독점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는 곧 교육이고, 교육은 곧 학교이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앞 문단에서 언급한대로 학교 바깥, 보다 정확히는 교육과정 바깥에 있는 배움이 가시화되거나 의미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 바깥에도 배움의 기회는 널려 있다. 하지만 배움의 증명은 학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렵다. 즉 우리가 배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철저하게 학교화되어 있다. 이반 일리치는 탈학교사회Deschooling Society에서 학교 제도 중심의 사회규범에 대한 해체를 주장했다. 이 책에서 일리치의 문제의식은 주로 학교 제도가 사회 불평등의 재생산에 끼치는 영향에 닿아 있지만, ‘사회를 탈학교화한다는 아이디어는 학교가 배움/교육의 경계를 구획하는 기준이 되는 우리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지금도 여러 대안학교에서 실험하고 있듯 학생들은 여행을 다니며, 혹은 논밭에서, 혹은 동네 카페에서 일하며 많은 것을 배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학교 바깥, 강의실 바깥,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 바깥의 배움을 어떻게 하면 학력과 유사한 자격으로 인정할 수 있을지, 그래서 한국 사회 특유의 학력 과잉을 해소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해외에서는 실제로 선행 학습 경험의 인정Recognition of Prior Learning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제도가 조금씩 도입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평생교육진흥원을 중심으로 제도 구축에 필요한 기반을 닦고 있는 상황이다.


학교 교육과정, 혹은 학교 졸업장의 독점적 지위를 해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에 앞서, 지금 상황에서도 각 학교에서 조금만 탄력적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면 학생들의 배움을 구성하는 경험은 훨씬 다채로워질 수 있다. 교육과정을 그냥 다 없애 버리자는 얘기가 아니다. 학교의 교육목표를 고려하되 다양한 배움의 경험을 포함할 수 있도록 조금만 시야를 확장해 보자는 것이다. 지금도 대학의 일부 학과나 직업학교, 혹은 대안학교에서는 실습이라는 형태로 외부와의 연계가 이뤄지고 있다. 학교에서 길러 내고자 하는 인재상에 비추어 볼 때 학교 바깥에 유의미한 경험이 존재한다면 교육과정의 범위가 담장을 넘어 확장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학교가 교육과 동일시되면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학교라는 공간을 구성하는 제1원리로서 교육이 자리 잡으면서 그 바깥의 은 학교 안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은 인간의 배움과 성장에 대한 보편적 현상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한국의 학교에서 교육이란, 교사와 학생을 막론하고 강요되는 단정한 복장, 45/50분 단위로 구획된 수업들, 잠깐 눈 붙이기도 부족한 쉬는 시간, 빡빡하게 짜여 있는 교육과정, 전국 어딜 가나 똑같은 교과목 등 소위 정상적인 학교를 구성하는 특정한 가치, 기준들의 덩어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덩어리들로부터 도출되는 학교의 이미지는 엄숙하기 그지없다. 엄숙한 교육기관으로서 학교는 특정한 형태의 교육 실천(입시 준비나 수업) 외에 다른 모든 삶의 양태를 잉여로 규정하고 금지한다. 학교에서는 연애도 안 되고, 스타일링도 안 된다. 애초에 연령 제한이 있긴 하지만 학교 바깥에선 상황에 따라 용인되기도 하는 술도 학교에서는 무조건 안 된다. 학교에 덧씌워진 강박적인 엄숙함은 교생은 춤추고 맥주 마시는 CF에 출연하면 안 된다는 지적질에서도 발견된다. 대저 한국 사회에서 학교가, 정말 사람이 사는공간인가 싶은 것이다. (대학의 사정은 중등학교보다 좀 낫지만 축제나 동아리소개제 기간도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아우성들을 보면 글쎄..) 


이게 사는 건가



이렇게 학교 바깥의 배움/교육이 충분히 의미화되지 않는 것과 학교가 과하게 엄숙하고 폐쇄적인 규범을 유지하는 것은 학교 = 교육이라는 관념에서 주조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국 사회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이 관념에 균열을 내는 실천을 기획하는 것이다



다양한 구조 접속의 가능성을 위하여


일리치는 《탈학교 사회에서 학교 제도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학습망을 중심으로 한 교육 시스템의 재구성을 주장한다. 즉 다양한 위상과 내용으로 구성된 교육기관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해 학교의 독점 구조를 해체하자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 당장 이런 아이디어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으나 조금씩 학교의 담장과 경계를 허무는 작업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신경생물학자인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앎의 나무에서 생물이 다른 생물, 환경과 끊임없이 구조 접속하는 과정 그 자체를 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를 세포나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조직 차원까지 확장한다. 이러한 통찰을 학교에 적용하면 어떨까? 학교라는 기관과 지역사회, 혹은 학교 바깥의 기관들이 구조 접속하는 지점이 많아질수록 학교에 흘러들어오는 삶의 경험도 다양해지고, 그 과정에서 학교가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배움의 기회 역시 많아지지 않을까? 이런 형태의 학교는 아마도 유일하고 특권적인 교육기관the one이 아니라 다양한 배움이 발생하는 수많은 조직, 기관들 중에 하나one of them로 다시 의미화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대안학교에서는 학교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의 도시형 대안학교 중 하나인 성미산학교의 경우, 애초에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학교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지금도 학생들이 마을에서 알바를 하거나 학교 바깥의 전문가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식으로 학교의 범위 자체를 지역사회로 확장하고 있다대학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대학의 경계를 허물고 침투하는 것은 주로 거대 자본들이지만 지역사회나 실제 직업 현장과의 연계를 통해 전문성을 기를 수 있다면 교육기관으로서 그러한 경험들을 교육과정에서 배제할 이유가 없다. 거창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김연아 선수가 고려대 체육교육과 학생으로서 생활체육 차원의 스케이팅 교육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일부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제는 공간보다 아이들을 사랑할 때


1994, 한 대학의 예비 교사들은 이제는 공간보다 아이들을 사랑할 때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노래 제목에 담긴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여전히 학교폭력, 자살, 교육과정 등 넘쳐 나는 교육 체제의 문제를 학생 개인의 책임으로 덮으려는 시도를 목격하고 있다. 학교만이 교육기관이어야 한다는 강박은 학교 안의 다양한 삶을 옥죄는 것은 물론 학교 바깥의 경험에 배움/교육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방해하고 있다. 이렇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형태의 학교를 수호하고자 하면서 그것이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한다.


이제는 정말 공간이 아닌 아이들을, 학생들을 바라볼 때이다. 물론 교육의 문제를 학생의 문제로 치환하지 않는 것, 그리고 학교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배움의 경험을 가시화하고 인정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직접 실천하기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새로운 교육의 모습을 상상하고 기획하려는 사람들은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그 복잡함과 어려움 덕분에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배움과 성장의 가능성은 점점 커져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