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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리뷰

[도서] 유토피아 : 우리는 어떻게, 얼마나 억압받고 있는가?














2005년 봄학기 서양의 문화적 전통 서평



 

우리는 어떻게, 얼마나 억압받고 있는가?
우리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새로운 이상사회



우리 사회는 얼마만큼의 자유를 우리에게 주고 있을까? , 얼마만큼 우리를 억압하고 있을까?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우리에겐 언제나 이런 물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를 억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분노하기 마련이며, 마치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처럼 우리를 기만하던 것들에 대해 몸서리치게 된다. 이렇게 우리를 억압하는 기제들은, 지금까지 하나씩 하나씩 밝혀져 왔지만, 여전히 많은 억압기제들이 감춰진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무엇이, 얼마만큼 우리를 억압하는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요구된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바로 이러한 질문이 어떤 식으로 제기되고, 다뤄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하여 "존재하지 않는 이상사회에 대한 공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작품 이면에 녹아있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깊은 성찰을 읽어내지 못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유토피아는 당시의 유럽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작품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억압기제들에 대해서도 풍부한 내용을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사회과학적 텍스트이기도 하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던 유럽 사회의 억압은 물론, 지금 우리 시대의 억압에 대해서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흔히 이상사회에 대한 책이라고 알고 있다. 범우사에서 나온 유토피아의 권두에는 마치 유토피아의 사회가 정말 이상적인 사회인 것처럼 서술해놓은 역자의 서언이 있다.

'유토피아'라는 새 말을 유행시킨 이 저작은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지만더 나아가 인류의 영원한 염원곧 자유와 평등이 실현된 행복한 사회생활을 하고 싶다는 염원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으며 (자유와 평등최선의 국가인간의 윤리적 건강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는 항상 참신한 교훈을 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토피아는 현대가 안고 있는 허다한 문제에 대해서도 훌륭한 해답이 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사회는 이상사회가 아니며, 이 사회의 시스템이 현대 사회에 대안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모어가 유토피아를 유럽 사회에 대해 비판하는 관점에서 썼기 때문에, 즉 기존의 유럽사회에서의 억압들을 이끌어내고 비판하면서 썼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보다는 분명히 유토피아 사회가 나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토피아 사회 내부에도 엄청나게 많은 억압이 존재하며, 그 억압은 실상 현대사회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토피아 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유재산이 없는 상태"이다. 라파엘(유토피아 사회를 탐험하고 돌아와 그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주인공)은 사유재산으로 인해서 사회의 수많은 모순들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사유재산이 없는 유토피아 사회가 유럽사회에 비해 이상적인 사회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러한가. 작품 속의 라파엘도, 현실의 작품 번역자도 이상사회라고 주장하는 유토피아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들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부터 그 모순점들을 하나씩 짚어보면서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억압들과 연결시켜 생각해보겠다. 이러한 과정은 끊임없이 앞서 언급한 물음을 던지는 과정이다. "우리는 얼마나 어떻게 억압받고 있는가?"

 

유토피아는 어째서 이상사회일 수 없는가


그러나 모어 선생솔직히 말씀드리면 사유 재산이 존속하고모든 것이 돈에 따라 판단되는 한 귀하는 진정한 정의나 번영을 결코 실현시킬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사회의 필수적 조건은 재산의 균등한 분배 이것은 자본주의 밑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라는 점이 너무나 명백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공공소유로 되어있는 유토피아 사회는, 라파엘의 주장에 따르면, 유일한 공화국이다. 누구나 결핍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사회의 이익을 우선에 두면서 살아가는 사회이다. 천박하게 표현하자면 돈 걱정, 밥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엄청나게 커다란 기제 중에 하나가 바로 경제적인 압박일 것이다. 좀 더 절실하게 표현하자면, "삶의 압박"인 것이다. 결핍에의 두려움이 불안감을 낳고,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 즉 개인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 일단 어떻게든 살고 봐야 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즉 자유로울 수 없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토피아 사회는 그런 억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공소유이면서도 결핍이 없는 사회이다. 현실에서 공산주의 사회들은 그렇지 못하다. 경제적으로 결핍한 사회이기에 공산주의 사회는 "좋지만 이상적인" 사상으로 세워진 사회라고 한다. 그렇다면 결핍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유토피아 사회는 이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타인을 배제하고 억압함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남은 불행해야만 하는가? 그렇게 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과연 인간들이 염원하는 이상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현실을 따지지 않고 '이상사회'를 생각해 본다면 마지막 질문에 "맞다"라고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유토피아 사회는 전혀 이상사회라고 할 수 없다. 유토피아 사회는 사유재산이 없어져서 개인의 욕심을 추구할 일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타인을 억압하고, 눌러야만 개인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닌,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없다. 는 맞는 연결이라고 치더라도, 의 연결은 맞지 않다. 유토피아 사회에는 너무나도 많은 타자적 주체들이 배제되어 있으며, 억압받고 있다. 


유토피아 사회에서 배제되는 '인간 외의' 존재

 

먼저 유토피아 사회는 "인간중심"의 사회이다. 이것은 "신중심 인간중심"에서의 인간중심이 아니라, 자연을 인간이 다스리려고 하는 인간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유토피아자체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깨고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모어가 생각하기에 "비판해야 할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이고, 지금도 인간들은 자연 위에 올라서 있으며 끊임없이 자연을 훼손시킴으로써 편의를 추구한다.
 

 그들은 숲 전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심기조차 합니다생산량 증가를 위해서가 아니라재목의 운반을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바다나 강이나 도시 가까운 곳으로 숲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자연을 인간의 편리에 맞게 "이용"하는 것이 좋다는 사고방식은 결코 인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피터 싱어와 같은 학자들은 근래에 "동물권"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익 동등 고려의 원리(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 - 모든 존재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하여 행동해야 한다. 동등한 고려는 보편적 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이익에 관한 관심을 넘어서 타인의 이익과 나의 이익이 동등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주장했다. 즉 인간 외의 존재에 대해서도 동등하게 고려하여 행동하는 것이, 나 이외의 타인에 대해서, 그들을 배려하고 나와 동등하게 여기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인간중심"의 이기주의에 빠져버리면, 단순히 인간-자연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인간-인간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앞서 언급했던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사회"는 불가능해진다. 이런 점에서 유토피아 사회는 이미 이상적인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인간 사회만을 보면 유토피아 사회는 이상적인가

 

인간 외의 존재까지 고려하기엔 너무나도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인간만의 사회에서라도 이상사회를 찾아보면, 유토피아 사회는 충분히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만의 사회라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도 없지만, 굳이 인정하더라도 유토피아 사회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 유토피아 사회는 이상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만 이상적"이라는 데 있다. 유토피아 사회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토피아 사회는 매우 이상적이다.


원주민이 유토피아 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그들은 병합된 지역 밖으로 축출됩니다만일 그들이 저항하려고 하면 유토피아 인들은 전쟁을 선언합니다원소유자가 스스로 이용하지 않고 단지 무용한 재산으로 소유하고만 있는 토지로부터 생산품을 얻어내는 자연권을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거부하는 경우에는,전쟁은 아주 정당한 것이라고 유토피아 인들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쟁은 그들이 절대로 싫어하는 일입니다. (전시에 있어서 그들의 주요 목적은 이전의 평화로운 수단에 의해 획득하지 못한 것을 얻는 데 있습니다. (매수 작전은 일반적으로 비열하고 잔인하다고 여겨지지만유토피아 인들은 이를 무척 자랑합니다. (유토피아 인들은 서로 극진히 사랑하므로단 한명의 시민을 희생해서 적국 왕과 맞바꾸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를 꺼립니다. (유토피아 인들은 좋은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나쁜 사람을 찾아내서 이용하는 데도 열성을 기울입니다.

 
전쟁을 절대로 싫어한다고 하는 이들이 하는 짓이란 제국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얼마나 위선적인가). 명령하고 따르지 않으면 전쟁하는 것. 유토피아 사회에서는 다른 사회에서 금전적으로 가치가 높은 귀금속들의 가치가 낮고, 또 그런 것들을 전쟁/외교 시에 써먹기 위해 저장해놓기 때문에 사회의 대외적인 힘이 상당히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강한 힘을 이용해서 다른 사회를 자신들의 의지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하며(특히나 힘이 약한 사회), 그 과정에서도 또 자신들의 구성원들을 희생시키려 하지 않고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을 이용한다(매수, 용병 고용). 이러한 사회는 그 사회의 내부 구성원들에게는 정말로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안전하게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진정으로 바람직한 사회라고 할 수 있는가? 타인을 억압함으로써, 타인을 누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자유가 이상적인 자유라고 한다면, 결국 그들보다 강한 사회가 나타나서 그들을 누르는 것까지 정당화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약육강식의 논리이지, 이상적인 정의가 실현되는 상태라고 할 수 없다. 

노예제도 마찬가지이다. 융은 그의 분석심리학 논고(London, 1928)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모든 로마인들은 노예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노예와 노예들의 심리가 고대 이탈리아에 흘러 넘쳤고 로마인은 - 물론 부지불식간이긴 하지만 - 내면적으로 노예가 되어버렸다. 언제나 노예들의 분위기 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무의식을 통해 노예의 심리에 젖어든 것이다. 이 같은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회 자체가 다른 사회를 억압함으로써 잘 유지되는 것이라면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와 습성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 내부의 구성원들은 대외적으로 사회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타인을 억압함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 건 노예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일을 해주기 때문에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이런 심리들이 자연스럽게 구성원들에게 녹아든다면, 그 사회는 이미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유토피아 사회 내부의 억압

 

여기서 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다른 사회까지 고려하는 것도 힘들고, 한 사회 내에서의 운영만을 본다면 유토피아 사회가 정말 이상사회가 아닐까. 바로 앞부분에서 "내부 구성원들에겐 정말 좋은 사회일 수도 있다"고 언급했는데 그것을 정정해야 할 것 같다. 단언컨대 다른 사회를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거니와, 만약에 고려하지 않고 유토피아 사회만을 본다고 쳐도 그것은 바람직한 사회라고 볼 수 없다. 또 다른 내부의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구하는 것은 육체적인 아름다움이라기보다 오히려 겸손과 남편에 대한 존경할 만한 태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 사회에서 억압받는 대표적인 주체는 여성이다. 여성들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다(굳이 길게 서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성들은 철저한 가부장제 질서 아래 남성들의 통제를 받고 있으며 이것은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다.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들 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근본적인 억압의 구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교묘해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토피아 사회 내부에서는 사회에서 제공하는 것들에 반하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유토피아 사회는 심각하게 통제되고 있는 사회이다. 경제만 계획경제가 아니다. 도시도 똑같으며, 옷도 똑같고, 하루의 생활 패턴도 똑같아야 하고 그 통제들을 따르지 않으면 죄인이 되고, 노예가 된다.

유토피아에서는 돈과 돈을 벌려는 열망이 동시에 제거되었기 때문에 기타의 많은 사회문제가 해결되었고 많은 범죄가 근절되었습니다.


물론 맞는 말일 수 있다. 개개인이 사사로운 욕심을 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욕심들을 제거하게 되면서 각각의 다양성, 개성, 창의성들까지 제거되어버린 것이다. 획일적으로 살아가야 하고, 그 획일성에 걸맞도록 끊임없이 통제를 가하고, 그 통제에도 불구하고 맞지 않는 사람들은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사회. 무서울 정도로 파시즘적인 사회이다.

 

새로운 이상사회

 

지금까지 유토피아 사회가 어째서 이상사회일 수 없는가에 대해서 서술해 보았다. 거듭 언급하지만 타인을 억압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자유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나의 자유가 억압되는 것 까지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 사회가 이렇게 억압적이라고 비판해보았는데, 그렇다면 현대사회는 어떤가? 

현대사회는 더 심하면 심했지, 유토피아 사회에 비해 하나도 나을 것이 없는 사회이다. 유토피아 사회에서 "해결된" 문제인 '개개인의 욕심추구'까지도 현대사회에선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을 스스로 억압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지" 라면서 하고 싶지도 않은 일들을 하며, 자신이 사용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자신의 의지'가 아닌 '사회의 의지'에 맡긴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양한 억압들엔 다양한 해결방법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모든 문제가 경제 구조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토피아의 사회를 아주 이상적인 사회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유토피아 사회에 얼마나 많은 억압들이 존재하는가? 유토피아 사회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다른 부분에서의 억압은 해결되지 않은 채, 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만 독자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다 섬세하게 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맨 앞에서 던졌던 질문, "우리는 어떻게, 얼마나 억압받고 있는가"이다. 무엇이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지 하나씩 전부 따져봐야 한다. 하나의 억압기제를 없앰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유토피아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억압기제들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그것들에 맞게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여성억압의 문제를 경제억압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보다 다양한 문제들에 다양한 해답들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항상 명심해야할 것은 "다른 이들을 억압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엄청난 이상론일 수 있다. 하지만 이상론이기에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이상은 현실이 이상을 따라가지 못한다 해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더 이상 이상이 될 수 없다. 새로운 이상 사회는 "사유재산이 폐지되고 경제적 억압이 없어진 사회"가 아니라 "어떤 주체도 억압받지 않고 모두가 자유로워지는 사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