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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리뷰

[영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영화 《21그램》













기말보고서를 편지형식으로 시도. 사실 굳이 편지일 필요는 없었음 -_-ㅋ 

그냥 분량확보 + 술술 풀어가기 편하라고 썼는데 뭐.. 평가는 나쁘지 않았음


2004년 가을학기 희랍비극 기말보고서







비극과 영화의 비교/대조를 통한 작품의 이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영화 《21그램》




편지를 띄우며


안녕하세요? 이 시대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처럼, 당신도 영화를 좋아하시겠지요. ! 아니라고 하셔도 상관없어요. 제가 다룰 내용은 그다지 영화에 대한 폭 넒은 이해나, 전문적 지식이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저는 그저 비극과 영화를 비교해보면서, 그를 통해 작품들을 좀 더 잘 이해해보고자 하는 것뿐이거든요.


직히 전 비극이라는 예술 자체가 수업을 듣고, 책을 한 번 읽어본다고 해서 확 머릿속에 박힐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좀 더 우리에게 일상적인(여기서 우리란 비극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을 말하죠.) 영화를 통해서 비극에 접근해보려 해요. 당연히 비극과 영화를 동일시하거나, 같은 수준의 예술로 본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비극과 영화는 매우 다른 방식의 예술이죠. 하지만 서로를 비춰보면서, 혹은 서로가 서로에게 접근하는 통로가 됨으로써 그것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참! 그리고 어떤 것이 더 고급스러운 예술이다 하는 판단은 내리지 않을까 합니다. 그저 두 작품을 소개/분석하는 것 까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거기서 더 이상 제시하는 것은 독단일 수 있기 때문이죠. 다만 밝혀둘 점은 아무래도 철저히 중립적일 수는 없다는 거죠. 이 점을 염두에 두신 채로 나머지의 편지들도 읽어주셨으면 해요. 제가 과연 어떤 작품을 더 선호하고 있는지 판단하시면서 읽으셔도 괜찮겠네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는 가장 뛰어난 비극작가로 불리기도 하지요.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사이의 시기에 맹활약했으며, 그의 오이디푸스 왕이 가장 유명한, 그리고 가장 위대한 비극작품으로 꼽히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셨겠죠? 그 내용도 너무나 유명하지만 앞으로의 이야기에 참고를 하기 위해, 또 혹시라도 모르는 분을 위해 잠깐 소개를 하겠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본래 코린트의 왕자였었는데 그가 아폴론 신전에 들렀을 때 자신이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모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끔찍한 신탁을 듣자, 이를 피하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방랑하다가 테베까지 가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 스핑크스와 대결하여 그가 낸 수수께끼를 최초로 풀어 자살하게 만들죠. 그 공 덕분에 오이디푸스는 비어있던 테베의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얼마 후 그가 다스리는 테베에 전염병이 엄습합니다. 델포이의 신탁에 의하면 선왕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아내어 형벌에 처해야만 했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즉시 살해자를 찾기 위한 수사에 착수하게 되죠. 오이디푸스는 맹인인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불러 라이오스 살해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라고 지시하나 테이레시아스는 살해자를 알고 있음에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에 오이디푸스가 그를 모욕하자 그는 왕의 모욕에 분노하여 범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오이디푸스 왕 자신임을 지적하고 나가버리죠.


왕비에게 라이오스가 살해될 당시의 정황을 캐어묻던 오이디푸스는 왕이 삼거리에서 죽었다는 말을 들으며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사실 그가 테베에 들어오던 중에 삼거리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어떤 노인을 살해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코린트의 왕이 사망했으므로 코린트에서는 오이디푸스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고국에 돌아와서 왕위에 오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고국에 돌아갔다가 어머니와 간음하는 불미스러운 신탁이 실현될 것을 두려워하여 망설이죠. 그러자 사자는 오이디푸스에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는 코린트 왕의 친자가 아니라 자기가 산 속의 목양자에게서 얻어 왕에게 바친 갓난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자의 이 말을 들은 이오카스테는 하얗게 질리며 과거를 탐색하려는 오이디푸스의 집념을 중지시키려고 만류하지만 그는 듣지 않고 그 목양자를 찾아 불러오라고 명령합니다. 목양자가 와서 사실을 은폐하려고 거짓말을 하지만 진실을 밝히려는 오이디푸스의 집념을 막을 수가 없었고, 결국 모든 진실이 밝혀지죠.


오이디푸스가 사실은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아들이었음이 밝혀지고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음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그 자리를 피한 어머니를 찾아 궁 안으로 들어갔으나 그때는 어머니 이오카스테가 이미 자살한 뒤였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사실을 꿰뚫어보지 못했던 자기의 눈을 뽑아버리고는 저주받은 죄인인 자기를 테베에서 추방해달하고 간청하지만, 새로 왕이 된 크레온이 쉽게 허락을 하지 않자 자기의 두 딸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손을 잡고 얄궂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가엾은 두 딸의 운명을 탄식하게 됩니다.


아주 유명한 내용이지요. 오이디푸스 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전형이라고 극찬한 바 있는 것처럼, 작자인 소포클레스 자신의 이름을 그리스 최대의 비극시인으로 불리게 만드는데 손색없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이제는 상대가 되는 영화 21그램의 내용을 보도록 하지요. 그러고 나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훨씬 이해가 잘 될 것 같네요.



알렉한드로 곤잘레스 감독의 영화 《21그램》


21그램2003년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숀 펜이라는 유명한 배우가 주연을 맡았죠. 아마 조금만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에 대해서 들어는 보셨을 겁니다. <사랑, 복수, 죄의 퍼즐 드라마>라는 광고카피가 매우 유명하죠. 나름대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리고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일반 관객들 사이에서 역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영화입니다.


사실 이번 편지의 주제를 정한 뒤에, 그것에 걸맞은 영화로 21그램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21그램을 본 뒤에, 주제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세 주인공의 삶이 너무 비극적이었기 때문이죠. 여기서 비극적이란 말은 그리스 비극과 비슷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일단 영화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 뒤에 하기로 할게요.


21그램》에는 크게 세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심장이식을 받아야 살 수 있는 폴, 행복한 중산층의 집안에서 사는 크리스티나, 전과자이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종교에 빠진 잭 조단. 사실 영화의 흥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주변인물들이 차지하는 역할도 매우 큽니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고뇌와 운명, 즉 제가 다루려고 하는 측면만 본다면 굳이 다른 주변인물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혹시 이 영화를 보게 되신다면 당연히 다른 인물들도 눈여겨보셔야 겠지요.


세 명의 주인공은 앞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굉장히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잭이 생일날에 크리스티나의 남편과 딸들을 치어, 그들이 죽게 됩니다. 그래서 장기이식에 의해, 심장이식이 필요했던 폴은 크리스티나 남편의 심장을 이식합니다. 이때부터 별 관련 없던 세 주인공의 삶은 넝쿨처럼 얽혀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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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식을 받은 폴은 문득 그 심장이 누구의 것인가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정도로 호기심을 가집니다. 누군가의 심장을 이식받아 살수 있는 자신과 측근들은 기뻐하지만 심장을 기증하고 죽은 사람과 그의 가족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너무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정책상 알려주질 않아, 탐정을 고용해서 누구의 심장인지,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는지 경위를 알아냅니다.


이후 크리스티나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접근하다 친해지게 됩니다. 이때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가족을 몰살한 잭을 점점 증오하게 되죠. 그런데 이렇게 친해질 때쯤에 폴은 심장이 몸에 적응을 못해 다시 다른 심장으로 이식받아야하며, 그때까지 입원해 있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심장이 멈출지 모른다는 얘기를 병원에서 듣습니다.


하지만 폴은 죽을 사람들 틈에 누워서 하늘의 별따기인 심장이식만 기다리느니 무언가를 하다가 죽고 싶다고 의사에게 선언하고, 크리스티나를 위해서 잭에게 복수하려 합니다. 그리고 뒷조사를 통해 감옥에 들어간 잭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잭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죠. 하지만 차마 못 죽이고 보내줍니다.


잭은 그날 저녁, 어떻게 알았는지 크리스티나와 폴이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그 이유는 폴의 손에 죽고 싶어서 입니다. 그는 자살을 시도 (감옥에서) 했지만, 자살조차도 마음대로 이루어 지지 못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그렇게 헌신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종교생활에 힘썼는데 의도치 않게 교통사고를 내서 한 가정을 파멸시킨 것에 대해, 그것이 결국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몫이라는 자괴감에)과 인생의 고통 때문에 너무나 괴로운 사람이고, 희망도 없는 영혼이기에 차라리 폴의 손에 죽고 싶어서 찾아간 것이지요.


찾아온 잭을, 크리스티나는 무차별적으로 폭행합니다. 잭은 가만히 맞고 있죠. 죽으려고 왔으니까요. 이때 마침 심장마비가 찾아와서 괴로워하던 폴은 자신의 어깨를 직접 총으로 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리에 크리스티나가 놀라서 폭행을 멈추고, 세 주인공은 모두 병원으로 가게 되죠. 결말은 단순합니다. 잭은 자신이 총을 쐈다고 주장하지만, 폴과 크리스티나와 모두 증언이 달랐기 때문에 풀려나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폴은 결국 죽게 되고, 크리스티나는 슬픔에 잠긴 채 남게 됩니다.


사실 21그램》이라는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형식적인 면이 큽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현란한 편집기술이 한 몫을 하지요. 부족한 솜씨로 내용만 대충 요약을 해놓은 관계로 이게 뭐가 재밌어하실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흥미보다는 주로 앞으로의 이야기에 사용할 줄기들을 위주로 설명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 영화가 대체 어떤 점에서 비극적일까요? 어디서 그리스의 비극과 유사할까요? 바로 보는 이가 주인공들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민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연민과 공포를 통해서 카타르시스가 발생하고, 그 카타르시스야말로 비극이 존재하는 목적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매우 비참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주인공인 오이디푸스에게 연민을 느끼지요. 또한 마찬가지로 영화 21그램의 주인공에게도 연민을 느낍니다. 하지만 연민이라는 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고 해서, 결코 같은 종류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느끼는 연민과, 21그램을 통해 느끼는 연민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에 대해선 어렴풋이 짐작하게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생각하는 차이점은 바로 주인공의 위치 때문에 발생합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왕이라는 높은 위치에 있는 권력자죠. 그리스 비극에서 이렇게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비극적 영웅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 영웅의 전락을 통해서, 높은 위치에 한없이 낮은 위치로의 전락을 통해서 더욱더 깊은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결말부에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정말 손가락질 받을만한 죄를 짓고, 눈까지 멀어버린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죠. 처음 부분에서 화려하게 등장한 것과 정말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21그램에서 느낄 수 있는 연민은 보다 우리의 현실에 가깝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왕과 우리를 동일시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지만, 사실 왕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보다는, 평범한 시민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 훨씬 쉽지요. 그래서 영화의 주인공들이 당한 불행에, 오이디푸스 왕보다 좀 더 가까운 감정으로, 좀 더 현실감 있는 감정으로 연민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21그램에서 이 부분에 관하여 주목해야 할 인물은 잭 조단입니다. 사실 크리스티나 같은 경우는 행복한 가정에서 완벽한 불행으로 전락을 한 경우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선 오이디푸스 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잭 조단의 경우는 매우 다릅니다.



잭 조단 - 너무나 비극적인, 그러나 비극적이지 않은


잭 조단은 그동안 사회의 밑바닥만을 경험하고, 정말로 진정한 행복이란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그리고 이제야 막 종교에 귀의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은 행복을 느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뭔가 일이 풀린다 싶을 때에, 그는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고교통사고를 일으킵니다. 한 가정을 파멸로 몰아간 교통사고를 자신이 일으킨 것이죠. 그는 벌벌 떨면서 내가 한 가정을 파괴했어, 한 아버지와 사랑받는 두 딸을 죽였어라면서 끊임없이 자책을 하죠. 그리고 감옥에 들어가서는 절망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몫이란 말인가. 결국 나는 이런 범죄자가 되어서, 한 가정의 파괴범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나의 몫이란 말인가하면서 말이죠.


잭 조단이 감옥에서 면회를 온 목사를 붙잡고 울부짖는 장면(위에서 언급했던 대사를)에서 관객들은 생각합니다. 아니, 억지로 생각한 다기 보단 자연스레 느끼게 됩니다. ‘정말 불쌍하다’ ‘어쩜 저럴 수 있을까’ ‘내가 저 상황이 된다면등등의 것들이 떠오르죠. 보신 분들이라면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여기서 연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물론 잭 조단도 살짝 행복해지려는 순간에 추락한 것이기 때문에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행복의 절정에서 추락한 것은 아닙니다. 불쌍할 정도로 사회의 밑바닥에서만 생활했던 잭 조단이기에, 관객은 불쌍함을 느끼는 것이죠. 너무나 비극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비극적이라는 말은 분명히 그리스 비극과 비슷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비참하고 슬프다라는 말이지요. 제 생각을 잠시 말씀드리자면 그리스 비극에서는 잭 조단과 같은 캐릭터가 영웅으로 등장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적 숭고의 정신과 맞지 않는 행동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비극적이고, 똑같이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해도 그것이 무엇을 드러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왕이 보여주는 그리스적 숭고


그렇다면 숭고란 무엇일까요? 오이디푸스 왕은 대체 어떤 점에서 잭 조단과 달랐던 것일까요? 바로 그 차이점은 자기의 행동이 초래한 결과에 대한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는 과정에서 행함을 통했느냐, ‘당함을 통했느냐 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닫고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르면서 자신의 죄를 한탄합니다. ‘스스로눈을 찌르게 되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반성합니다. 크레온에게 자신을 나라에서 쫓아내달라고 부탁하면서, 또한 딸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말이죠. 반면에 잭 조단은 비록 자신의 행동이 무지에서 발생한 것이었음에도 그 결과에 대해 한탄하고 반성한 오이디푸스 왕과는 달리, 좌절과 절망만을 경험하고 모든 책임을 신에게 돌려버립니다.


또한 결과를 초래하는 과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직접 선택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즉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오이디푸스는 그런 진실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여 자신의 지위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왕비인 이오카스테의 만류마저 뿌리치고 오이디푸스는 이미 뭔가 불안하고, 진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에게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자기 자신을 파멸의 진실속으로 이끕니다. 바로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말이죠.


똑같이 하마르티아(무지, 성격적 결함) 때문에 비극적인 결과가 나왔는데 한 명은 그것을 반성하고, 한탄하며 책임을 지려 합니다.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비관하고, 나중에는 죽으려고 작정을 합니다(앞에 영화 줄거리 소개에서 언급했다시피). 오이디푸스 왕이 그 상황에서 자살을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고통스럽게도 눈을 찌르고 방황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행위입니다. 죽음은 도피일 뿐입니다. 비록 죽음보다 못한 더욱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웅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훨씬 고통이 덜할지라도, 영웅 자신이 그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진정 그리스적 영웅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잭 조단은 그런 점에서 비극적이긴 하나 절대로 영웅적인 정신을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잭 조단에게 그러한 영웅적 정신과 겉보기에 매우 비슷한 성질이 있기는 합니다. 앞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는데, 사실 잭 조단은 처음에는 뺑소니를 쳤습니다. 교통사고를 낸 후에 집에 돌아와서 바들바들 떨면서 부인에게 사실을 얘기하죠. 부인의 판단으로는, 잭 조단이 이 가정을 떠나 감옥으로 들어가면, 이미 파괴된 크리스티나의 가정은 물론이고 잭 조단 자신의 가정까지 파탄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잭 조단을 말립니다. 하지만 잭 조단은 감옥으로 굳이 가겠다고 우깁니다. 죄값을 치르겠다면서 말이죠.


그렇다면 이 점에서 잭 조단은 행함을 통해 자신이 받을 고통을 알면서도 받아들인 것이 되는 건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잭 조단이 감옥에 스스로 찾아간 것은 최소한의 양심에 의한 것이었지, 고통을 뻔히 알면서도 꿋꿋이 나아가는 영웅적 정신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바로 그 감옥에 가서 한 행동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진정 자신의 죄값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 감옥에 갔다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운명을 비관하기만 하고 나중에는 신을 저주하고 자살까지 시도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의 정신의 크기는 그런 위대함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작았습니다. 21그램에서 오히려 그런 정신과 조금이나마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폴일 것입니다.



폴 리버스 - 선택, 그리고 선택


폴은 심장을 이식받아야만 살 수 있는 중환자였습니다. 그리고 잭 조단이 치여 숨지게 한, 크리스티나의 남편의 심장을 이식받아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심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찾아 나섭니다. 저는 이것이 폴이 보여주는 첫 번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폴의 부인은 끝끝내 그것이 누군지를 찾아내는 것을 반대하고, 병원에서도 역시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폴의 정의, 심장을 이식받았다는 것은 그 가정의 누군가가 죽었다는 뜻이었고, 바로 그 사람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살아났다는 사실 때문에 어떻게든 그 가정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으론 누군지 모르고 감사하게 살아가는 것이 속편할 것 같은데 말이죠. 폴은 그렇지 않았나봅니다.


끝끝내 사설탐정까지 고용해서 폴은 심장의 주인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크리스티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하다보니, 그 크리스티나의 가정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범인에 대해서 증오감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이 증오감은 크리스티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군요. 이 때쯤에 폴은 의사로부터 심장이 몸에 맞지 않아 곧 정지될 가능성이 크니, 다시 입원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여기서 그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심장이식은 말 그대로 하늘에 별따기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복수를 해주는 것이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러다 죽는 한이 있어도 병실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죠. 이것이 폴의 두 번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심장을 이용해서라도, 폴은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이 이유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는 대신 시한부 인생을 택합니다.


어쨌든 폴은 잭 조단을 찾아내고,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됩니다. 그는 잭 조단에게 총을 겨눈 채로 외칩니다. “너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 나쁜 자식그리고 총을 쏩니다. 바로 바닥을 향해서. 안 그래도 죄책감과 운명에 대한 저주 등으로 정신상태가 최악이었던 잭 조단은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물론 사고를 당한 가족들이 자신을 저주할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직접 죽인다고 찾아오니 더욱 놀랐던 것이겠지요. 폴은 잭 조단을 보내주면서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폴의 선택이겠지요. 폴은 어쩌면 잭 조단에 대해서 조사를 하면서 그의 불쌍한 삶을 이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이겠지요.


제가 폴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바로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옵니다. 죽으려고 찾아온 잭 조단과 정신없이 잭 조단을 내려치는 크리스티나, 그리고 심장에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한 폴. 폴은 처음에 크리스티나를 열심히 말리지만(잭 조단이 죽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노의 감정 때문에 맹목적으로 잭 조단을 때리는 크리스티나를 도저히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어깨에 총을 발사합니다. 이 부분을 두고 많은 해석이 존재합니다. 고통을 잊고 죽기 위해 총을 발사했다느니, 잘못 쐈다느니... 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총소리를 통해서, 자신에게 주의를 돌려 크리스티나가 잭 조단을 죽이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지요. 아마 자살을 하려 했다면 어깨가 아니라 생명과 직결된 부분에 총을 쐈겠지요. 그럴 정도의 의식은 분명히 존재했으니까요. 적어도 잭 조단을 위해서, 그리고 크리스티나를 위해서, 무엇보다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폴은 자신의 어깨를 쏩니다. 만약에 총을 허공에 쐈다면 크리스티나는 그저 한번 쳐다보고 계속 잭 조단을 때렸겠지요. 자신의 몸을 위험한 상태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잭 조단에게 자신의 존재와 크리스티나의 존재를 알림으로써 발생한 이 사태에 책임을 지기 위해, 고통을 택한 것이지요. 오이디푸스 왕처럼 말이죠.


겨우 그 정도의 고통을 선택했다고 해서 감히 오이디푸스 왕과 비교될 수 있나라며 저를 비판하실 수도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이 마치 죽음을 택하지 않고 자신의 눈을 찔러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정의를 실현했던 것처럼, 폴은 자살하지 않고 자신의 어깨에 총을 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그 점을 전달하고 싶은 것입니다. 폴은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언제나 고통은 받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 병원에 들어간 것도 위대한 선택이었다면, 아무리 나쁜 이유라도 선택만 하면 위대한 거냐?’라고 물으실 수 있겠네요. 하지만 보십시오. 폴은 결코 잭 조단을 죽이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잭 조단을 조사해가는 과정에서 이미 그의 불쌍한 삶에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폴의 선택이 결코 불순한’ ‘위험한이유에서 나온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이 보여준 영웅적 신념을 위한 선택, 오히려 그것과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반전과 인식


계속 영화 얘기만 해서 지루하실 지도 모르겠군요. 이제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바꿔볼까요? 비극이 카타르시스를 잘 이끌어내는 데 필요한 형식적 장치로 반전발견이라는 것이 있다는 건 아시겠죠? 반전이란, 줄거리가 급격하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말하고, 발견은 주인공이 무언가를 인식하게 됨으로써 줄거리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하지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사실 반전과 인식이 코린토스에서 온 사자에 의해 동시에 발생합니다. 그에 의해서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고, 하나하나씩 과거의 사건들을 밝혀나가게 되죠. 이것이 인식, 또는 발견이라면 바로 그런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급격하게 사건이 비극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반전이라 할 수 있겠죠.


비극에서 이런 반전과 발견이 쓰이는 이유는 바로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관객들은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기에 이런 발견을 해나가면서 점점 자신의 정체에 접근해가는, 그리고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올 것을 예고되는 부분에서 더욱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 카타르시스 효과가 촉진되는 것입니다.


사실 반전과 발견은 비극에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나 소설에서도 흔히 차용되는 기법이지요. 긴장감을 통해서, 짜릿한 쾌감을 맛보기 위해서랄까요? 바로 그 쾌감이 그리스 비극에 의해 나타나는 카타르시스와 비슷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영화 21그램에서는 이렇다할 반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전과 비슷한 극적 전환이 일어나기는 하지요.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았던 크리스티나에 의해 나타납니다.



크리스티나와 이오카스테


크리스티나는 가족을 잃고 무기력한 나날을 보냅니다. 여기서 폴이 그녀에게 접근하죠. 신경질적인 크리스티나도, 자신에게 무작정 잘해주는 폴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폴은 자신이 크리스티나의 남편으로부터 심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크리스티나에게 말하게 됩니다. 크리스티나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 부분에서 한 번 극적인 전환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극적 전환이라기 보단, 뭐랄까요. 주인공의 인식이라고 하는 편이 가까울지 모릅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이야기의 방향이 변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무튼 크리스티나는 폴에게 거의 미친 듯이 울부짖고, 욕을 하고, 자신의 운명과 폴의 운명을 저주합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자가, 그 교통사고를 통해, 남편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니, 사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런데 이런 크리스티나가 어쩌면 이오카스테와 상당히 닮아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요.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죽이고, 스핑크스를 물리친 뒤, 라이오스가 죽어서 공석이었던 테베의 왕 자리에 오릅니다. 물론 정확한 대응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폴과 상당히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교통사고에 의해 크리스티나의 남편은 죽고, 폴은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오카스테는 크리스티나와 상당히 흡사합니다. 자신의 전 남편을 죽인, 자신의 아들과 결혼한 여자, 마찬가지로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남편이 죽음으로써 생명을 얻은 남자와 사랑을 하게 된 여자라고 할 수 있죠. 이런 캐릭터들의 삶 역시 매우 비극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비극적이지만, 결코 그들이 택한 행동을 통해서는 커다란 정신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이오카스테 같은 경우에는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알아가는 것을 말리다가 일이 틀어지자 자살을 했고, 크리스티나는 끝끝내 잭 조단을 용서하거나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자신이 행동에 나선 것도 아니라 수동적으로 폴에게 기대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은-우연인지 아닌지 둘 다 여성이군요다른 인물들의 비극적 행동을 부각시켜주기 위한 도구(표현이 말끔하진 않지만)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를 만류하는 행동을 통해서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알아가는 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부각시키게 되었고, 크리스티나는 잭 조단을 수도 없이 내려침으로써, 폴이 자신의 정의를 위해 자신의 어깨에 총을 쏘는 선택을 하게 만들어서, 폴의 행위를 부각시키게 된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어째서 여성들은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을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만 하는 것일까요? 여성주의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고민해나가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무엇을 주는가


작품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감상하고, 감상자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작품이지요.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이디푸스 왕의 운명에 의해 우리는 인간의 무지와 인간 행운의 덧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확신했던 것들이 얼마나 불확실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맹목적일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떠한 우리의 삶의 기반을 이루던 것들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운명)에 대해 경외심을 느끼고 또 한편으로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연민과 이러한 공포를 통해 우리는 자기해방의 카타르시스, 즉 우리를 맹목적으로 만드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을 맞을 수 있게 됩니다.


21그램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운명에 대한 공포, 주인공들의 비극적 삶에 대한 연민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돌아보고, 내 영혼의 무게에 대해서(영화제목인 21그램은 영혼의 무게라고 하네요)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또한 현재의 고통스런 삶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하지요. ‘봐라, 저런 아픔도 있지만 삶은 계속 된다’ - "Life goes on" 이 영화에 가장 자주 나오는 대사랍니다.



맺으며 - 위대한 비극 오이디푸스 왕, 잘 만든 영화 21그램


이제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건방진 시도였는지 모르고, 제대로 작품들을 이해도 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글을 써서 왜곡된 부분이 많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의 이해가, 여러분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점은 분명할 듯 합니다. 왜냐하면 저도, 여러분도 이 시대라는 공통된 환경 속에서 삶을 경험해왔으니까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위대한 비극입니다. 훌륭한 형식적 장치들은 물론, 내용 역시 그리스적 숭고의 정신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위대한 비극과 흥행을 위해, 즉 팔아먹기 위해 만들어진 일개 영화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비극에 대한 모독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21그램이 어쩌면 오이디푸스 왕보다 훨씬 더 보는 이에게 비극적 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오이디푸스 왕보다 좀 더 가까운 현실로 보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실제로 영화라는 통로가 비극작품이라는 통로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영화가 비극보다 훨씬 좋고, 위대한 장르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분명히 비극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영화라는 장르는 그다지 좋게만 보일 수는 없습니다. 일단 영화의 최우선 목표가 흥행이기 때문에 상업성으로 물들고, 비극보다 더 큰 위대한 정신을 담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너무 가벼운 것으로만 보고, 그것에서 아무런 메시지도, 아무런 교훈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잘 자잘하고, 훨씬 현실 속에서 경험하기 쉬운 이야기들은 비극보다는 영화에 담겨있기 때문이지요. 비극이 노렸던 효과, 즉 감정적 카타르시스는 어쩌면 그리스 시대의 것과는 다른 형태로, 영화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제가 21그램을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비극 오이디푸스 왕보다 영화 21그램이 현대인들에겐 훨씬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기가 쉬울 테니까요. 그것이 옳기만 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쉽게 느끼고 쉽게 쉽게 잊는 것은 당연히 지양해야할 바이지요. 다만, 이런 영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교훈적인 효과를 누릴 수 있고, 특히나 21그램같은 경우는 그리스 비극과 연결되는 부분(그것이 비극과 비슷하다 다르다를 떠나서)이 많다고 생각했기에 제가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때, 퍼즐드라마라는 형식이나 화면의 구도, 상징성 같은 것들은 매우 뛰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미래에 나타날 결과를 중간 중간에 편집된 화면으로 보여줌으로써, 뭐랄까요. 비극의 결말을 관객들이 모두 알면서 감상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번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최대한 유기적인 연결이 되도록 나름대로 고심을 해보았지만, 주제가 넘어갈 때마다 헷갈리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군요.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이해하는 데 있어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유기적으로 주제를 나누어 이어갈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해 보았습니다만 여전히 부족한 것이 느껴집니다. 혹 읽는데 불편하셨을까 걱정이 되네요. 이제 지루한 편지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겨울입니다. 감기 조심하시고요, 언젠가 인연이 된다면 다시 글을 나눌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김상봉(2003).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천병희(2002). 그리스 비극의 이해. 문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