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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잉여의교육학

《反지성 프로젝트 vol.2》와 2011년 서울대학교 본부점거농성














<교육공동체 벗>에서 내는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2012년 5,6월호)에 기고한 글



지성 프로젝트 vol.22011년 서울대학교 본부점거농성

 대학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또 하나의 이야기




흔히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지성을 전면에 내세운 음반이 출시됐다. 지성 프로젝트 vol.2(지성)는 작년 말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법인화법 반대의 메시지와 법인화 반대 투쟁의 기억을 노래하기 위해 기획하고 제작한 앨범이다. 수록된 곡은 히든트랙을 포함해 9곡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꽤나 다채롭다. 앨범이 시작된 계기는 분명 투쟁인데 전투적인 곡들보다는 성장과 아픔을 이야기하며 듣는 이를 감싸 안는 곡들의 비중이 더 크다. 그래서 이 앨범을 통해 풀어나갈 이야기는 법인화나 법인화 투쟁에 대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글은 아프니까 청춘이라기보다는, ‘아프니까 소리치는(지성, 아프니까 청춘이다) 청춘들의 배움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약 1년 전 오늘의 교육에서 다뤘던 이 시대 대학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작은 덧붙임이다. 



서울대학교 본부점거농성 - 배움과 성장의 공간


지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2011년 서울대학교 본부점거농성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201012월 서울대학교 법인화법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뒤, 수많은 학내외 사회구성원들의 우려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당국은 법인화 추진을 강행하며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한다. 이에 서울대 학생들은 총회를 개최하고 설립준비위원회를 해체하기 위한 본부점거농성을 의결, 그 자리에서 바로 점거농성에 돌입한다



여기까지는 흔한 대학가 교육투쟁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지만 점거농성돌입 이후의 전개는 이전에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모습이었다. 점거농성이 이뤄지는 기간 본부에는 엄숙함과 불안, 공포보다는 생동감이 더 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금세 사람들이 모여 테이블을 옮기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역할 분담을 했다. 물을 계속 끓이고 공급하는 일은 법대 친구가 도와주었다. 부족할까 직접 원두를 사가지고 온 공대생은 나와 함께 커피를 내렸다. (점묘법[각주:1], 22p)


영화 동아리 소속이며 영화를 남과 함께 보는 경험을 즐기는 한 친구가 집행부 측에 영화를 틀 공간을 달라고 건의했고, 본부 내부에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자 영화공동체 씨네꼼에서 활동하던 몇몇 사람들이 의기투합하여 야외극장을 꾸렸다. (점묘법, 57p)


본부를 거점으로 노천카페가 열렸고, 야밤에서 새벽까지는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며, 본부 벽면은 온갖 패러디 창작물로 뒤덮였다. 저녁에는 <보이는 라디오>가 진행되어 사연을 받았고, 매일 열리는 문화제에서 뭔가 해보자는 사람들이 모이면 노래연습, 안무연습이 이뤄졌다. 이렇게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경험은 자연스럽게 배움과 성장으로 이어진다. 본부 안에는 당시의 전기 사용량이 안전한지 아닌지와 같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정보[각주:2]에서부터 커다란 행사를 준비할 때 필요한 역할들은 무엇이고 업무체계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와 같은 조금 더 복합적인 역량에 이르기까지, 배움의 기회가 수없이 널려 있었다. 그 중에 백미는 아마도 매일 같이 먹고 자면서도 서로 최대한 덜 불편할 수 있도록 공통의 규범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리고 함께 복작대며 뭔가를 작당할 동료들을, 즉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학생들의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본부점거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지도부가 전술을 채택하고 체계적으로 교육/실천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기 보다는 다양한 관점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어떻게 끌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그 고민의 결과로 나온 기획에 각자의 의사에 따라 함께했다. 본부점거농성 중반에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패러디 총장실 프리덤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2층에서 상주하고 있던 노래패에서 가사를 만들고, 몸짓패와 함께 안무를 짠 것이 시작이었다. 군무 장면은 매일 저녁 해지기 전에 있었던 전체 모임이 끝난 직후 메가폰을 들고 '총장실 프리덤 안무 하실 줄 아는 분은 모두 모여주세요'라고 해서 모은 사람들과 함께 찍었다. 맨 처음의 가사와 안무를 기획했던 것에서부터 뮤직비디오 촬영, 그리고 편집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인력들은 점거 농성에 참여하고 있던 이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확보되었다. (점묘법, 29~31p)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협업하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안에서 배움과 성장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특히나 본부점거농성과 관련된 일련의 기획들은 전문가들의 분업이라기보다는 아마추어들의 협업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그 성장의 잠재성이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


공통된 이슈를 공유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 속에서 호응을 얻고, 구체화되고, 수정을 거친다. 그런 식으로 아이디어는 발전한다. 특히 '부족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아이디어를 품어낼 수 있는 공간 속에서 협업할 수 있다는 조건은 어떤 성취를 이루어내기 위해 아주 적합했다고 볼 수 있다. 부족하지만 다양한 사람들과의 화학작용에 의한 성장, 더 큰 창의와 창조를 예비케 하는 성장이다. (점묘법, 32p)


총장실 프리덤뿐만 아니라 본부스탁 페스티벌, 그리고 본부점거농성이 해제된 이후에 그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점거!지성도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녀들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공명할 수 있는(점묘법, 32p)공간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빛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학생들 스스로의 의지와 참여를 통한 공동체 경험은 자연스레 자치에 대한 관심과 정치적 주체로서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자치를 익혀가는 성장의 과정은 항상 미숙하고 불안한 자신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려 하는 자신사이에서의 분열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지성의 노래에는 이러한 불안, 분열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난 아직 미성년자 술은 마실 수 있어도 미성년자 (지성, 미성년자)


엄마 말이 아빠 말이 틀릴 수는 없는데 모르겠어 모르겠어 생각할 시간을 줘

아빠 말 안 듣고 사는 건 겁나 겁나 겁나 (지성, 착한 아이 콤플렉스)


하지만 이런 분열을 겪는다고 해서 배움과 성장의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꽤 많은 사람들에게 본부점거농성은 시키지도 않은 무언갈 해본건 처음(지성,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이라 기억할 수 있는, 밀도 있는 자치 경험이었을 것이다


나만 너무 줏대 없이 쓸려간 건 아닐까 싶었다. 나도 제대로 생각해보고 참여하고 싶었다. 선배와 동기 몇몇이 반방에 모였을 때 얘기가 시작된다. 법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점거 농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기를 하며 조금은 내 입장이 만들어졌다. 점거농성에 계속 참여하자. (점묘법, 8~9p)


따라서 이 경험의 의미는 단순히 재밌었다, 신기했다 정도에서 그칠 수 없다.


어느날 살아있단건 싸우는거란 내게는 낯선 깃발을 본 그 순간엔 

괜시리 무서워져 조금은 떨렸지 하지만 산다는게 언제나 동화같을 수는 없어

소중한 건 놓지 못하는 단단한 마음이 필요해 (지성,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살아있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라는 구호가 가지는 의미가 무서움에서 소중한 걸 놓지 못하는 단단한 마음로 전환되는 것은 중요한 변화이다. 이런 작지만 중요한 변화들이 본부점거농성이 이뤄지는 동안, 그리고 각종 후속기획이 나오는 동안 한 명 한 명의 구성원들에게 쌓였을 것이다. 그래서 본부점거농성은 분명 패배했지만, 결코 실패했다고 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거기에 형성된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붕괴와 대학의 교육 불가능


하지만 눈을 돌려 본부점거농성 바깥의 학생사회를 바라보면 그러한 성장의 경험이 충분히 확장될 수 있으리라고 쉽게 전망할 수 없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의 공명은커녕 당장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언덕, 즉 손닿는 거리에 있는 공동체들마저 무너지고 있다. 총학생회 선거는 매년 어찌어찌 치러지지만 각 단과대 학생회장 선거는 후보가 없어 무산되기 일쑤이고, /반 학생회는 연초에 반짝 친목 모임을 준비하는 정도로 면면을 유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대학생활의 로망이라는 동아리에서도 활동할 사람이 없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기존에 기층이라고 불리던 학생사회의 공동체 기반은 지금 앙상한 골격을 겨우 유지하는 모양새이다.


이것은 학생사회의 교육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이다. 나는 대학 생활에서 많은 것들을 강의실 바깥의 공동체에서 배웠다. 학생회, 동아리, 자치언론 등등 내가 겪었던 다양한 공동체들은 그 하나하나가 구성원들이 서로 의지하고 공명할 수 있는 작은 본부점거농성과 같았다. 셔틀버스 이용하는 법과 같은 단순한 정보에서, 소규모 집단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가지는 무게감, 인간관계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내가 20대에 조금이나마 성장했다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지식/기술/태도의 대부분은 공동체에서 만난 동료들과의 교류에서 쌓아올린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를 자극하고 성장시켜줄 수 있는 공동체가, 즉 우리의 동료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축소된다는 것은 결국 강의실 바깥의 유의미한 배움/성장의 통로가 무너짐을 의미한다. 대학생들은 분명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 즉 사람이다그렇기에 바로 그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붕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대학 안에서 살아가며배울 수 없다는 뜻이다.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언어로는 채워질 수 없는 경험의 공백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시대 대학이 교육 불가능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공백을 메울 방법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대학행정당국 역시 이 문제를 인식하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신입생 교육을 담당하는 기초교육원, 그리고 학생들의 정신건강을 책임지는 대학생활문화원을 중심으로 선후배를 이어주는 멘토링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하지만 자발적으로 다수에 의해 구성되는 공동체와 비교할 때인위적으로 맺어진 1:1의 관계가 가지는 한계는 클 수밖에 없다대학 본부에서는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2박 3일 동안 학생회의 새내기 새로배움터와 유사한 멤버십형성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지만전혀 연속성이 담보되지 않는 2박 3일의 만남이 서로가 서로에게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인연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무엇보다, 학생들끼리 함께 공동체를 구성하고 또 운영함으로써 형성될 수 있는 유대관계를 행정당국에서 직접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일 수 있다.




결국 공은 학생사회로 넘어온다. 최근 몇 년, 학생사회에서 공동체를 복원하자는 구호는 공허한 정답으로 박제돼있다. 그 목표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보다 중요한 어떻게가 빈 칸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쟁에서 탈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공동체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엄혹한 조건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은 이미 뿌려져있기 마련이다.



희망을 바라보며


본부점거농성을 통해 드러난 희망의 씨앗은, 꽤 많은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그 안에서 경험한 많은 것들을 굉장히 즐겼다는 사실이다


장사를 하느라 과제를 딜레이 한 사람도 있었고 시험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원래 있던 약속을 취소하고 장사를 한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헛수고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경제적이지 못할지라도, 이윤창출이 되지 않는 일일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 우리들에겐 커피 한 잔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점묘법, 22~23p)


사람들은 이렇게 비합리적인, 손해가 되는 헛수고를 기꺼이 감수한다. 그리고 이윤과 경제적 수치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함께 느끼는 동료들을, 그 동료들과 함께하는 성장의 경험을 바란다. 그렇기에 우리가 발 딛고 선 곳의 하늘이 흐릴지는 몰라도, 여기는 불빛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깜깜한 진공의 공간은 아니다


시작은 어렵고 두 번은 안 된다며 

모두들 말이 없고 하늘도 흐리지만

우리는 아직도 여기에서 노래해 

불어오는 바람을 가로질러 걸어가 (지성, 그날)


눈을 들어 잘 살펴보면 작은 불빛들이, “아직도 여기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보이기에, “불어오는 바람을 가로질러 걸어갈 수 있다는 희망도 떠오른다.


계단에 걸터앉아 미래를 말하고 

그림을 덧씌우고 노래를 채우고

연필을 손에 쥔 채 밤을 지새우고 

저마다의 희망은 글이 되어 맺혀 (지성, 그날)


우리가 미래를 말하고, 그림을 덧씌우고, 노래를 채우는 곳은 지성의 공간인 강의실과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잔디밭, 동아리방, 광장, 차가운 농성장 바닥, 길거리 등등 어디든지 우리의 동료가 있는 공간이다. 그렇게 지성 바깥에서도 우리는 동료와 함께 배우고 성장한다. 그렇기에 지성은 지성의 전당을 운운하며 온갖 꼴불견을 자행한 대학행정당국을 비꼬는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지성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배움과 성장이 누군가가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휘둘러 친 회색의 담벼락 바깥에서도 가능하다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다. 우리의 동료들과 함께하는 지성은 결코 교육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성과 같은 기획, 실천,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협력과 성장을 차단하는 지금 대학사회의 조건이야말로 교육적이다. 우리는 삶을 옥죄는 조건, 그리고 학문하지 않는 대학에 대한 문제제기만큼이나 동료를 허하라는 요구를 내세울 필요가 있다. 그것이 교육 불가능에 처한 대학이 교육기관으로서 다시 가능성을 회복하기 위한 조건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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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기서 인용하는 《점묘법》은 본부점거에 관련된 글을 모아놓은 문집이다. 지면사정상 담지 못한 재밌는 이야기가 많으므로 꼭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본문으로]
  2. 점거농성 초기, 멀티탭에 빼곡하게 꽂힌 랩탑/핸드폰 충전기를 보고 참여자 중 누군가가 전기사용량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 이에 공대학생회가 나서서 공식적인 조사와 계산을 통해 ‘문제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사건은 ‘공대학생회의 위엄’이라는 표현과 함께 회자되며, 본부점거농성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자는 분위기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