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고/리뷰

[도서] 학교와 계급재생산 - 반학교문화, 그리고 학교에 대한 보다 섬세한 이해를 위하여














2006년 봄학기 교육사회학 서평





반학교문화, 그리고 학교에 대한 보다 섬세한 이해를 위하여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재생산》을 읽고




학교의 기능


간단한, 그리고 누구나 들어보았음직한 질문 하나를 던져보겠다. 학교는 뭐하는 곳인가? 흔히 학교는 교육하는 곳이라고, 혹은 교육하는 곳이어야 한다고들 한다. 답이 뻔한 질문이다. 질문을 바꿔보자. 학교는 대체 어떤 기능을 하는가? 학교가 존재하는 목적과 실제 학교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은 꼭 같지만은 않을 수 있다. 자동차가 인간의 이동 혹은 화물 운송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 목적과는 별개로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학교 역시 교육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교육과 별반 상관없어 보이는 기능 역시 수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바로 이런 학교의 독특한, 그리고 충격적인 기능에 대한 연구서이다.



학교와 계급재생산: 구조 결정론에서 인간의 능동성에 대한 긍정으로


폴 윌리스의 연구는 1970년대 영국의 한 공업도시의 종합학교를, 그 학교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원제는 Learning to Labour : How working class kids get working class job, 직역하면 노동학습 : 노동자의 자녀들이 노동자가 되기까지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윌리스는 노동자라는 계급이 어떻게 학교를 거쳐 세대 간에 대물림되고 있는가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의 연구는 보울즈와 진티스, 부르디외와 번스타인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재생산이론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김기석, 1994). 기존의 재생산이론에서 학교는 노동자 계급을 노동자 계급으로, 지배 계급을 지배 계급으로 재생산해내면서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것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 , 학교는 노동자 계급의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실패하게만들고 그 실패조차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이바지하는 기관인 것이다.


반면에 윌리스는 학교가 그리 순조롭게 재생산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윌리스가 면담하고 연구한 싸나이들lads”은 노동계급의 자식들로, 지배적인 학교의 문화에 저항하는 반학교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학생들이다. 이들은 학교에서 제시하는 너희들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어와 같은 말들이 허구임을 간파하고 있다. 이에 학교에서 교사들이 가치를 부여하는 문화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유지시킨다. 싸나이들은 이 과정에서 학교의 지배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 범생이들earoles”과 자신들 사이의 차이를 철저히 드러내며, 그들만의 가치를 공유하고 집단적인 일탈행위 등을 통해 결속을 다진다.


싸나이들의 문화는 이데올로기의 작용과 그들의 행동/인식 자체에서 발생하는 제약에 의해 결과적으로는 학교의 재생산 기능에 복속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기존의 재생산론자들이 펼쳤던 이론처럼 순탄하지만은 않다. 이들은 구조에 따라 수동적으로 노동자라는 직업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들이 노동자라는 직업을 선택한다. 바로 이 능동성이 기존의 학자들이 간과하던 측면이다. 싸나이들은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문화를 생산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학교에서 주어지는 것들에 대해 거부할 줄도 안다. 이런 능동적인 개인이 존재할 때, 구조는 기존의 재생산론자들의 주장처럼 완벽한/순탄한 재생산을 장담하기 힘들어진다.


윌리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반학교문화를 구성해나가는 학생들의 능동성을 긍정했지만 앞서 언급했다시피 결국에는 구조의 재생산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구조 속의 주체들이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구조에 포섭된다는 주장 - 지나친 낙관론도 비관론도 아닌 설득력있는 설명, 거기에 탄탄한 연구를 통해 근거까지 충분한 이 주장이 바로 윌리스의 독창성과 날카로운 통찰을 드러내준다.


결국 폴 윌리스의 분석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싸나이들의 반학교문화는 그 자체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특성은 구조의 재생산을 순탄치 않게 함으로써 탈재생산의 가능성을 가진다(반학교문화의 가능성). 그렇지만 그 반학교문화는 노동계급의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싸나이들은 자발적으로노동계급의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이런 과정은 결과적으로는 학교를 거쳐 계급이 재생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역설적 재생산).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의문점이 남는다. 싸나이들이 자발적으로 노동계급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즉 역설적 재생산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은 그 반학교문화의 기반이 노동계급의 문화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싸나이들이 긍정하는 가치는 분명히 노동자들이 긍정하는 가치이고, 실제로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폴 윌리스 자신도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의 문화에 기반을 두지 않는 반학교문화는 역설적 재생산을 불러오지 않고, 그 가능성을 조금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반학교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의 확장 : 한국 사회를 고려하여


윌리스의 분석틀을 그대로 한국 사회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윌리스의 분석틀에서 전자의 것, 즉 반학교문화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굳이 계급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례에 대해서만 고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반학교문화의 예를 들어보라 하면, 금방 떠오르는 답이 있다. 바로 교실붕괴 담론이다. 교실붕괴는 무려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담론이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엎드려 자거나 졸고, 딴 짓을 하는 것은 물론, 교사의 직접적인 지시에도 불응하는 등 학교문화에 저항하고 있다. 이런 교실붕괴 현상은 학교문화와 청소년문화 사이의 갈등 때문에 발생한다(조용환, 2000). 청소년들은 학교에만 다니는 것이 아니다. /녀들은 학교 바깥에서 대중문화를 경험하고, 가정에서는 가정의 문화를, 또래집단에서는 또래집단만의 문화를 경험한다. 현대의 청소년들은 이전보다 풍요롭고 민주적인 가정에서 자라났으며, 소비문화, 대중문화가 가지는 속도감, 화려함을 즐기고, 문자가 아닌 영상에 익숙하다.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이렇게 변했는데 학교는 사실 그다지 많이 변하지 않았다. 문화라는 측면에서 보다 자세하게 들어가 보자면 다음과 같은 분석이 가능하다.



청소년들을 둘러싼 문화, 그리고 그 문화와 청소년이 맺는 관계에 대해서 옆의 그림과 같은 모형을 가정할 수 있다. 청소년들은 청소년들을 둘러싼 여러 집단/사회가 가진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영향을 받는 동시에 각각의 문화들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반응한다. 어떤 문화를 더욱 내면화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반응은 저항이 될 수도 있고, 순응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분석틀에 따르면 교실붕괴라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는 학교문화가 청소년들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와 배치되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 밖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들이 학교 안에서는 억압되는 경우가 많으며(배경내, 2006),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들도, 그 방식들도, 그리고 심지어는 평가까지도 청소년들의 문화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조용환, 2000). 이러니 학교문화에 대한 일부 청소년들의 반응은 저항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학교문화, 혹은 학교문화와 맞닿아있는 문화들을 보다 내면화한 이들은 학교에 순응할 것이다.


여기서 반학교문화의 형성은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다른 문화들의 영향 속에서 이뤄진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반학교문화는 윌리스의 연구처럼 계급재생산과의 관련에서만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교실 붕괴 현상은 특정 계급에 해당하는 얘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이혁규, 2003; 이건만, 1999).



학교에 대한 보다 섬세한 이해를 위하여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학교에서 반학교문화를 구성해가는 학생들의 능동성을 포착함으로써 재생산이론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이 구성해낸 반학교문화는 분명히 노동자계급이 가진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좀 더 비중을 두어, 반학교문화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면 계급재생산 이외에 학교의 새로운 기능이 눈에 보일 수 있다.


도대체 한국의 청소년들이 구성해나가고 있는 저항, 반학교문화는 어떤 근원에 의해 형성되는가? 그리고 그 문화의 결과로서 청소년들은 어떤 의식을 가지게 되는가? 그 의식이 가져오는 사회적 영향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교육사회학은 학교교육에 대한 이유 있는 의심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계급재생산의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학교의 기능들, 그것들을 파헤치는 것이 곧 학교교육에 대한 이유 있는 의심을 이어가는 것 아닐까?



참고문헌


김기석(1994). 문화재생산이론. 교육과학사.

배경내(2006).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2판). 우리교육.

이건만(1999). 학교교육과 청소년 저항문화에 관한 연구. 한국학술진흥재단 연구결과논문.

이혁규(2003). 질적 사례 연구를 통한 교실붕괴 현상의 이해와 진단. 교육인류학연구 6(2). 125-164.

조용환(2000). 교실붕괴의 교육인류학적 분석. 교육인류학연구 3(2). 43-66.


폴 윌리스. 김찬호 김영훈 역(2004). 학교와 계급재생산 - 반학교문화, 일상, 저항. 이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