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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리뷰

[논문] 잠재적 교육과정과 갈등의 본질 - 교육과정은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가













2005년 가을학기 교육사회학 비평




교육과정은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가

<잠재적 교육과정과 갈등의 본질>을 읽고




들어가며


우리는 흔히 학교 = 교육기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물론 학교에서도 교육은 발생한다. 하지만 교육''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는 사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다음 세대에게 주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를 거치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다. 또한 폴 윌리스에 따르면, 학교는 계급을 재생산해내는 기능 역시 하고 있다. 이런 '교육 외적' 기능들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바로 명시적,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교육과정과 상관없는 여러 생활 통제들을 통해서 발생한다.


처음에 애플의 《교육과 이데올로기 》에서 <잠재적 교육과정과 갈등의 본질>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는, 잠재적 교육과정이 학교에서의 규율이라든지, 기타 수업과 상관없는 생활에 관한 것들을 말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잠재적 교육과정은 명시적 교육과정과 대비되는, 즉 교과지식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드러나지는 않지만" 내재되어 있는 숨겨진 교육과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애플이 이 텍스트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학교의 교육과정이 잠재적으로 "갈등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애플은 과학교과와 사회교과의 예를 들어, 학교에서 어떻게 갈등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지 체계적이고 명쾌하게 설명해놓았다.



갈등의 본질에 대한 왜곡


애플은 과학교과와 사회교과의 예를 들면서, 교육과정이 '명시적이진 않지만 잠재적으로 갈등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갈등은 사회의 발전에 걸림돌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발전시키는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갈등은 어떤 제도나 잘못된 사회적 틀이 고착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갈등 없이 돌아가는 사회는 제대로 된 전체주의 사회, 혹은 말 그대로 파라다이스 밖에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의 세계에서도 항상 갈등은 발생해 왔으며, 그 갈등이 바로 과학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갈등이 없었다면 지동설도 있을 수 없었으며, 뉴턴의 절대적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다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이론으로 나아가는 물리학의 흐름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과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회는 합의체제가 아니다. 사회교과에서 갈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갈등"에 대한 지배계급의 불안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지배계급은 현재의 기득권 세력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갈등은 자신들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과나 과학과에서 갈등을 "은근히" 부정적으로 몰아가고, 또는 아예 갈등의 긍정적 기능을 "서술하지 않음으로써"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은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 역사 교과서


애플의 분석은 사실 한국에 그대로 적용시키기엔 무리가 있다. 분명 내가 배웠던 6차 교육과정 일반사회 교과서에서는 갈등의 긍정적 기능에 대해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애플의 주장이 아예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단적인 예로, 역사 교과서를 들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흔히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 쉽게 분노하며, 비판한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그럼 얼마나 객관적이고, 왜곡 없이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실상 결코 나을 것이 없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 특히 현대사는 왜곡이 정말 심하다. 이런 왜곡은 어떤 사실에 대해 '거짓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특정 사실에 대한 서술을 '누락'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왜곡이다. 애플은 "이러한 일은 갈등의 부정적 가치를 공공연히 드러냄으로써가 아니라, 교과목에서 지적 규범적 갈등의 중요성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가능하게 된다"(강조는 필자) 라며, 의도적인 누락 역시 왜곡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에서 베트남전은 어떻게 서술되고 있는가? 박정희 집권 시기에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함으로써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식으로 나와 있다. 일제가 36년간 식민통치를 하면서, 한국 국민들을 수탈하고 괴롭힌 것에 대해서는 주구장창 서술해놓았으면서, 베트남에 간 한국 군인들이 현지인들을 어떻게 수탈하고 괴롭혔는가에 대한 서술은 한 자도 나와 있지 않다. 한국 땅 침범한 일본인들은 나쁘지만, 베트남을 침공하는데 일조한 한국인들은 나쁘지 않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민족주의적 오류인가?


또한 여순 사건이라든지, 제주도 4.3 사건이라든지 굵직굵직한, 명백히 정부가 잘못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7차 교육과정으로 넘어가면서, 현대사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에서 풀려남으로써 이제는 조금 그 서술에 있어서 나아진 면이 있다고는 한다. 하지만 국정 교과서였던 6차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여전히 7차 교육과정의 교과서에서도 이런 "갈등적인" 사건에 대한 서술은 '정부를 세웠다'든지,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와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에 비해 적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나가며 -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이런 왜곡은 정말 심각한 문제를 나을 수 있다. 예를 들어, 5.18과 같은 사건에 대해서 "서술은 많았다"고 하자. 하지만 항상 5.18에 대한 서술은 결국 전두환이 하야하고, 6.29 선언을 이끌어냄으로써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식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불거진 비정규직 문제라든지, 여전히 민주적이기 보단 억압적인 상황에 대한 서술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역사 교과서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충분히 아름다운 사회가 된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여전히 화장실도, 식당도 없는 곳에서 일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노동자 열사들이 나오고 있는 이 현실이 대체 어디가 나아졌다는 것인가? 아니, 나아지고 안 나아지고의 판단은 사실 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은 서술하고, 어떤 것은 서술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이다. 사회의 갈등에 대한, 어두움에 대한 서술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왜 그럴까? 앞서 언급했듯이 지배계급은 갈등을 은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교육과정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 물론 완전히 중립적인 교육과정은 나올 수 없겠지만, 최소한 너무 심하게 왜곡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마이클 애플. 박부권 이혜영 역(1985). 교육과 이데올로기.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