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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리뷰

[도서] 살아 움직이는 역사를 위하여 - 《독립신문, 다시 읽기》를 읽고














2005년 가을학기 인문학글쓰기 서평





살아 움직이는 역사를 위하여

《독립신문, 다시 읽기》를 읽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흔히 한국의 근현대사를 민주화의 역사라고 칭한다. 민중들이 힘을 합쳐 이승만의 독재를 막아냈던 4.19혁명이라든지, 신군부의 억압에 정면으로 맞섰던 5.18 광주 민중항쟁이라든지,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876월 항쟁과 같은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보면 민주화의 역사라는 말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이렇게 해방 이후 50여 년간을 이어온 민주화 운동의 성과로, 우리는 적어도 형식적인 민주주의 - 지방자치, 선거제 - 만큼은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실질적인 국민의 지배가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수많은 국민들이 당장 생계에 위협을 느끼면서 재벌들의 돈놀이를 바라봐야 하며, 어째서 학문적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둔 교수가 사상이 불온하단 이유로 수사를 받아야 하며, 어째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죽어야만 하는가? 한국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기에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도 많은 비주류, 주변인들이 존재한다.


, 우리는 지금도 민주화가 완성된 상태가 아닌, 그 과정 속에 있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 고민의 와중에서 지금까지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떤 계기에 의해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발전해왔는지를 탐구하는 것은 앞으로의 민주화 운동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독립신문》과 《독립신문, 다시 읽기》


우선, 독립신문누가 나라의 주인인가?”라는 문제, 즉 정치공동체의 인적 구성 원리에 대해서 조선시대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사상을 보여주고, 이를 본격적으로 대중화시킨 최초의 주역이었다. () 특히, 만민공동회는 이 책에서 처음 밝혀진 바처럼 한국적 직접민주주의의 원형이며, 독립신문이 존재했던 38개월의 기간은 왕조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최초의 사회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이었다. (독립신문, 다시 읽기, 17~18)


독립신문19세기말 독립협회가 주축이 되어 발행했던 신문이다. 그 안에서 우린 조선 사회가 가진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은 물론 당시로선 굉장히 진보적인 주장들 - 예를 들자면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다, 관인은 백성의 종이다 등등 - 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립신문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구한말 지식인들의 생각이 담겨있다. 이 땅에 최초로 민주주의를 도입하고자 했던 과거의 지식인들. 그들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독립신문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지금의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실천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독립신문, 다시 읽기는 바로 그 독립신문의 논설들 중에 당시의 시대상을 잘 전달한다고 생각하는 글들을 모아 만든 선집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독립신문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책은 단순히 독립신문을 현대어로 옮겨놓기만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독립신문자기 방식대로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 결과, 살아있는 역사를 책 속에 가두고 말았다. 흘러간 역사를 다시 읽는다는 건, 그 시대와 대면하고 소통한다는 것이다. 그 소통을 통해 우리는 지금 나아가야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되고, ‘흘러간 역사는 우리의 실천 속에서 다시금 살아 움직이는 역사가 된다. 그런데 독립신문, 다시 읽기독립신문과의 진실한 소통을 방해하고 말았다. 독립신문을 읽기 쉽게 현대어로 옮겨놓은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실천이다. 문제는 머리말해제에 나타난 엮은이들의 해석이다. 원래 머리말해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쓰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독립신문, 다시 읽기머리말해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독자에게 오해만을 안겨준다.



살아있는 역사로서의 《독립신문》- 적극적인 대중과 민주주의


독립신문, 다시 읽기가 가진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독립신문의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잠깐 책은 잊고, 독립신문과 만나고, 소통해보자. 소재는? 앞서 우리가 앞으로도 고민해야 할 주제로 언급했던 '새로운 사회와 민주주의'라면 충분히 괜찮은 얘깃거리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 민주주의. 이런 단어와 어울릴법한 19세기 말의 사건이 있다. 바로 만민공동회다. 만민공동회는 간단히 말하면 독립협회의 주최로 열린 민중대회, 집회라고 할 수 있다. 그 자리엔 누구나 참여해서 발언하고, 토론하고, 논쟁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가 구한말 서울의 종로거리에서 재현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만민공동회에서 오갔던 담론이다. 사실상 만민공동회의 담론은 곧 독립신문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신문은 구한말 관리들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했으며, 문벌제도, 노비제도, 여성억압 등에 대해 비판하는 등 진보적인 목소리를 냈다. 만민공동회에서도 역시 여러 전근대적인 악습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연좌법과 노륙법에 대한 반대운동, 고문에 대한 반대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근대적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한 운동이며 그만큼 대중의 의식이 성장해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민공동회가 가진 중요한 의의는 그것이 자발적인 대중들의 적극적인 참여였다는 것이다. 독립신문, 다시 읽기에서는 만민공동회를 4.19 혁명, 그리고 최근의 촛불시위와 비교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런 사건들은 대중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행동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발적 대중에 의한 직접 행동, 그리고 그들 스스로에 의한 담론의 형성. 이것이야 말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이렇듯 만민공동회는 성공적이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린다고 해서 그것이 성공하리란 보장이 있을까? 만민공동회가 열렸던 시점은 정부가 전근대적 권력은 잃어가면서 근대적 체계도 확실히 정비하지 못한, 한 마디로 말해서 정부의 힘이 상당히 약했던 시기였다. 게다가 독립신문의 한글전용으로 인해 민중들이 마침내 주체로 서기 시작했던, 그동안 쌓여왔던 민중의 에너지가 발현되기 좋은 시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다른 만큼, 상황이 좀 다르다. 근대적 국가 체계는 기틀이 잡혔으며, 그만큼 정부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대의 민주주의에 의해, 중요한 의사결정은 국민의 직접 참여가 아닌, 간접적인 참여방식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대중은 적극적인가? 언제 경제적 위기가 올지 모른다는 사회적 불안은 대중을 점점 개인주의적으로 만들고 있다. 정의 혹은 사회 변혁이 문제가 아니라 일단 나 자신의 생계, 안전부터 챙겨야 하는 상황이니 대중의 정치참여가 원활히 이뤄질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기대하긴 어려운 걸까?독립신문은 끊임없이 노력했다. 전근대적인 사회를 근대화한다는 게, 통치의 대상이었던 - 수동적이었던 - 백성들을 주체적인 시민으로 끌어올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상을 제시하면서,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해볼 수 있다. 물론 시대 상황이 다른 만큼 똑같은 방식으론 되지 않는다. 그 방법에 대해선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 한다. 독립신문은 그런 방법론을 연구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이 사회에 맞는 민주주의를,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찾아가는 우리의 실천 속에서 독립신문은 다시금 살아있는 역사가 될 수 있다.



《독립신문》의 한계 - 타자화와 배제의 원리


이제부터는 독립신문의 이면, 독립신문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역사상 그 어떤 것도 사회에 좋은 영향만을, 혹은 나쁜 영향만을 끼치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신문이 우리 사회에 끼친 악영향은 생각보다 꽤 크다.


독립신문은 조선을 근대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과정에서 근대적 인민의 권리에 대해 설파하고 여러 사회적 악습에 대해 비판한 건 물론 의미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근대화의 모델이 미국, 영국,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었다는 것이다. 개화를 외치는 독립신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실상 [문명개화 = 미국/영국/일본 되기]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독립신문에서 제시하는 예법은 조선 고유의 것인 유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딱 서양식 예법이다. 또한 잔풍패속이라 하여 모든 무속신앙을 부정하는데, 이는 무속신앙이 그 지역 공동체에 얼마나 큰 순기능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그저 문명은 좋고 문명 아닌 것은 나쁘다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의 실정에 맞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문명을 닮아가자는 것이다. 독립신문, 다시 읽기에 실려 있는 여러 논설들을 읽어보면 독립신문이 어느 국가에 긍정적이었는지 뻔히 - 영국, 미국 -알 수 있다.


독립신문에는 바로 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 타자화와 배제 - 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물론 그것은 근대의 특징상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독립신문은 너무 심하게 무비판적이었다. 내 기억에 국사 교과서에는 개화기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민족적 저항과 자주적 근대화의 모색비슷하게 설명해놓고 있었다. 자주적 근대화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근대화. 그것이 독립신문의 시도였다.


그 목숨을 나라와 의리를 위하여 내버리기로 작정만 한다면, 으레 죽을 리도 없지만, 설령 죽더라도 자기에게 영광이요, 자기 같이 죽는 사람이 5~6 사람만 있어도 그 까닭에 국민이 중흥하여 후손들이 세계에서 상등 백성으로 명백한 법률 밑에서 충의 있는 신민이 되어 세계 각국에 대접을 받고 살터이니 이런 좋은 일을 위해 목숨이 무엇이 아까운가(독립신문, 18971221)


근대적 사고방식은 주체대상을 설정하여 주체가 대상을 억압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다. 근대적 제국주의에서의 주체는 국가이다. 국민이 한 몸 바칠 수 있는 국가, 그 국가가 주체가 됐을 때 다른 나라/민족들은 대상이 된다. 대상이란 주체로부터 분리/배제된 것이다. 서로를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그 원리가 바로 전쟁을 부르고, 전혀 사적인 원한이 없는 두 나라 국민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만 한다.


하지만 위와 같이 공동체를 위해 개인은 희생할 수도 있다는 무지막지한 글이 논설의 이름을 달고 독립신문에 실렸다. 다른 예도 많다. 1899726일자 논설 <힘과 지혜>에서는 작은 개미 여럿이 협력해서 싸워 큰 벌레를 이기는 우화를 통해, 조선이 지금 약한 나라지만, 지혜를 쓰고 국민들의 힘을 모은다면 큰 나라도 이길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건 대놓고 힘 키워서 열강이 되자는 소리다. 이런 독립신문의 제국주의적 근대화는 이후 한국의 근대사 100년을 국가주의 - 대표적으로 박정희의 독재; 조국 발전을 위해 개인 노동자는 희생하라?, 베트남전 참전 등 - 로 물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것은독립신문의 명백한 한계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한계이다. 시대적 상황을 봤을 때, 그 당시의 지식인들 - 전근대적 국가와 근대적 문명국가를 동시에 경험한 - 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 역시 앞으로의 새로운 사회를, 민주주의(배제의 원리 없는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데 있어 참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립신문의 역사적 가치는 다시 한 번 확인된다.


문제는 독립신문, 다시 읽기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독립신문을 띄우기만 한다. 만민공동회에 대한 의미 부여라든지, 새로운 사회계약에 대한 놀라운 분석 등은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비판이 없다. 이는 독립신문이 제국주의 국가에 가진 환상과 다를 바 없는 환상이다. 이 책만 읽는다면, 독자는 독립신문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볼 수밖에 없다. 독립신문, 다시 읽기독립신문이 가진 풍부한 역사적 교훈들을 독자로 하여금 바로 대면할 수 없게, 독립신문을 텍스트 속에 가둬버렸다.



살아 움직이는 역사를 위하여 - 새로운 민주주의에의 꿈


우리는 지금까지 독립신문을 보고,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를 보았다. 그 근대화의 과정은 성공(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가능성)인 동시에 실패(제국주의적 근대화)였다. 독립신문은 전근대적인 사회를 근대화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 근대는 밑바닥이 드러났다.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 그에 따라 나타나는 배제의 원리. 서로가 타자화 되면서 합의할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지는 것. 그것이 근대적 사고방식이 가진 한계이고, 더 이상 근대적인대안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여러 다양한 목소리들이, 차이들이 배제되지 않고 인정/합의 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이제 근대와 다른 새로운 사고방식, 즉 탈근대적인 사고방식을 요구한다. 여성/남성, 정규직/비정규직, 가진 자/못 가진 자, 자본/노동자, 그리고 산 자/죽은 자로 갈려있는 지금의 사회에선 원만한 의사소통도 사회적 합의도 제대로 이끌어 낼 수 없다. 이제 모든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꿈꿀 때이다. 서로 간에 조금씩의 차이가 존재할 뿐인 다양한 주체들이 공존하는 사회, 그리고 그 주체들의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그것을 통해 움직이는 사회를 그려본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새로운 시민사회, 민주주의의 모습 아닐까




참고문헌


독립신문강독회(2004). 독립신문 다시 읽기. 푸른역사.

박노자(2003). 나를 배반한 역사. 인물과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