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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리뷰

[뮤지컬] 인간본성에 대한 유쾌한 성찰, 《파우스트》















2004년 봄학기 독일문화와생활 감상문



인간본성에 대한 유쾌한 성찰, 《파우스트》



괴테가 남긴 명작 파우스트(Faust). 그 파우스트를 각색한 뮤지컬 파우스트》를 국립극장에서 관람하게 되었다. 원래 파우스트》라는 작품은 책이 두껍기도 하거니와, 인간 본성의 선악이라는 난해하고 고루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쉽게 다가가기 힘들었다. 파우스트》를 뮤지컬로 각색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대체 어떻게 하면 그 작품을 뮤지컬로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물론 시극이라는 형태를 지니고 있기에 그 형식을 뮤지컬로 바꾸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작품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나 다양한 효과를 어떻게 표현할지 상당히 궁금했다.


이러한 궁금증을 안고 조용히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한 배우의 무용이 시작되면서,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배우는 마치 갑갑한 것에 갇혀있는 사람이 힘겹게 몸을 펴듯이, 또는 잠재되어 있는 여러 욕구들을 발산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과 같은 동작을 보여주었다. 주제넘은 예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무용은 갑갑한 골방에 갇혀 있던 파우스트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낡은 방에 갇혀서 진리만을 탐구해오던 파우스트 내부에서 꿈틀대는 바깥 세상에 대한 욕망. 그 욕망이 바로 그러한 현란한 동작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메피스토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 파우스트가 시작됐다. 메피스토와 천사들 간의 대화 장면이 펼쳐지면서 국립극장의 거울과 조명을 잘 이용한 무대장치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거울(?)로 되어있는 이동식 무대장치는 이후로도 다양한 효과를 잘 살려주었다. 비록 파우스트가 극의 주인공이긴 했지만, 극을 주도하는 것은 거의 메피스토였다. 메피스토가 늙은 파우스트에게 어둠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장면에서는 웅장한 합창소리와 화려한 시각효과, 그리고 약간 낯 뜨거운 장면 같은 것들이 어둠의 세계라는 측면을 잘 묘사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에게 세상의 쾌락, 마시고 노는 것을 보여준다. 눈앞에 악마를 보고도 그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거기에 파우스트까지 어울리게 하면서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서서히 물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간쯤에 파우스트에게 진주즉 원작에서의 그레첸을 앞서 얘기했던 거울장치 뒤에 살짝 보여줌으로써 파우스트를 타락시키기 위한 각본을 짜나간다. 무대장치를 잘 이용한 훌륭한 복선이었다고 생각된다.


늙은 파우스트가 타락한 무리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 그리고 악마들이 파우스트에 달라붙어 있는 장면은 여러 동작이나 노래를 들을 수 있어 좋긴 했지만, 상당히 언밸런스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파우스트가 상당히 늙어버린 할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는 찰나에 파우스트가 외친다. “이봐 메피스토! 이 늙은이를 골탕먹이려는 것이냐! 네가 정말 악마라면 나를 젊어지게 해봐!” 악마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파우스트가 순간 불쌍하고 나약해 보였다. 메피스토는 마녀를 통해 파우스트를 젊어지게 하고, 파우스트는 엄청 멋있어져서(!!) 다시 나타난다.


젊어진 파우스트의 멋들어진 독창에 이어 본격적으로 러브스토리가 시작된다. 파우스트는 순결마케팅으로 뜨고 있는 연예인 진주를 보고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앞서 말했지만 젊어지기 전의 파우스트가 세상에 나아갈 때, 진주는 거울 뒤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그 장면은 확실히 메피스토가 계략적으로 파우스트를 타락시키기 위해 준비한 것 같았다. ‘순결 마케팅의 성공을 위해 오빠에 의해 갇혀 지내는 진주에게 사랑을 느낀 파우스트는 메피스토를 통해 진주에게 작업을 걸기 시작한다. 갇혀 있는 진주의 독창 장면은 외롭게 갇혀 지낼 수밖에 없는 이의 슬픔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진주의 외로움을 알고, 자신 역시 진주와 함께 있고 싶어 괴로운 파우스트와 진주와의 듀엣송은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의 감정이 잘 묻어난 명곡이었다.


그들의 사랑이 무르익어 갈 때, 메피스토는 악마의 모습을 드러내 파우스트로 하여금 진주의 오빠를 살해하게 하고, 진주를 파멸로 이끈다. 파우스트, 진주, 진주의 오빠가 노래를 하면서 무대를 헤매는 씬, “그럴 리가 없어, 그래도 나만 사랑해주신다면(진주)” “내 눈으로 확인하겠어(파우스트)” “죽여 버리겠어(오빠, 파우스트)” “하하하(옆에서 웃는 메피스토)” 이 씬은 악마의 계교에 의해 파멸하는 세 사람을 잘 나타낸 명장면이었다고 생각된다.


파멸 이후, 진주는 미쳐버리게 되고 파우스트와의 아이를 물에 던져버리고 살해 죄로 감옥에 가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파라다이스에서 보낸 무의미한 나날들을 뒤로 하고, 목숨을 걸고 진주를 구하러 간다. 그리고 감옥에서의 진주의 노래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슬픈 곡(왕비의 금잔)이었다. 미쳐버린 진주와 그것이 자기 탓임에 괴로워하는 파우스트, 두 연인의 대화는 상당히 지루한 면이 있긴 했지만 비극적인 사랑을 잘 표현해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늙은 육체 밖에 없는 파우스트, 그리고 그 파우스트를 지배하려는 메피스토. 계약에 따르면 이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종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메피스토로부터 벗어난다. 그가 진주와의 사랑을 통해 느낀 쾌락과 행복은 메피스토의 유혹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다.


뮤지컬 파우스트는 전체적으로 유쾌하다. 물론 내용상으로 연인들의 슬픈 사랑, 비극적 결말이 드러나는 부분은 유쾌하다라는 표현과 거리가 멀지만, 그것보다는 유쾌한 노래들과 춤들이 전체 뮤지컬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무겁고 다양한 철학적 성찰이 들어있는 원작의 무게를 좀 줄여서 각색하긴 했지만, 결국 그 교훈은 같다. 인간의 본성이 여러 방황 속에서도 그 참된 길을 찾아가게 된다는 것. 파우스트는 세상 속에서 진리를 구하기 위해 메피스토를 따라 나와 많은 방황을 하게 되지만, 결국 진실된 사랑을 발견하고 메피스토와의 내기에서 이기게 된 것이다.


원작의 비극1부만을 추출해 내어 원작만큼 심오한 성찰은 이끌어 낼 수 없었지만, 뮤지컬 파우스트》는 충분히 인간 본성에 관한 성찰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그러한 주제를 놓고 수많은 명곡과 안무를 통해 보여준 화려한 공연무대. 공연이 끝난 후 나는 계속해서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파우스트를 책으로 볼 때 무미건조하게 지나간 시, 장면들이 무대에서 구현될 때(젊어진 파우스트가 열창한 아홉이 하나고, 열은 없어진주의 왕비님의 금잔’) 나는 뭔가 새롭고, 그것이 가슴에 더욱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뮤지컬 파우스트. 내 생애 처음으로 본 뮤지컬이자 상당히 멋있었고, 재밌었고, 생각할 거리까지 던져준 명작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