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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잉여의교육학

삶에서 발견하는 교육













지난 학기 수업 '평생학습과 생애경로' 기말페이퍼를 매체 기고용으로 다듬은 버전
원문은 요기 (생애경로, 이행, 그리고 교육학의 문제) 꽤 많이 편집/수정함 ㅇㅇ


<교육공동체 벗>에서 내는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2012년 3,4월호)에 기고한 글


 
삶에서 발견하는 교육
죽은 시인의 사회를 넘어선 교육비평을 상상하다


얼마 전, 교원 임용고사에서 교육학 객관식 시험을 폐지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미 내년도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의 얼굴이 스치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는 내 입장에서 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이 기사를 통해 드러난 교육학의 위상이었다. 교육학이 이렇게 주요 매체에서 기사화되어 다뤄질 정도로 이슈가 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교육학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사실 교사/공무원 임용시험을 위한 교직학과 거의 같은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양 없는 교육학

그래서일까? ‘대중적인 교육학 강좌교양 교육학 서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임용시험을 보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그래서 딱딱한참고서다. 대학의 연구자들은 각자 자신의 화두에 맞게 교육현상을 분석하고 그것이 학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논의할 뿐,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특별히 하지 않고 있다. 이러다보니 학교가 교육()의 전부가 아니고, 충분히 대중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교육학의 콘텐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전문가집단이 교육학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거의 없다. “(학교)교육이라는 말은 대중들의 입에 항상 오르내리지만, ‘교육을 둘러싼 사유의 흔적들(교육학)은 시험이나 연구 같은, 왠지 재미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점유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교육학은 교양 없는 학문인 것이다. 대형서점의 교육학 섹션, 주요 온라인 서점의 홈페이지를 둘러보면 완전히 대학교재용인 몇몇 개론서들이나 학교로 대표되는 교육 제도를 다루는 에세이, 평론집 등이 발견될 뿐, 인간 현상의 하나로서 교육을 다루는 교육학 교양 저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교육학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는 것은, ‘문제적인상황이다. 우리는 바로 얼마 전에 제도권 인문학의 위기를 목격했다. 다양한 진단이 나왔지만, 나는 대학/학회에 부여된 학문적인 권위가 끊임없이 그 내부에서 유통되는 지식과 관련된 규범을 강화/재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배타적인 학문공동체가 형성되어 대중성의 재생산에 실패했다는 평가에 동의한다. 다시 말해, 전문가집단인 우리끼리 재밌어하고, ‘우리끼리 싸우고, ‘우리끼리 제도를 만들고, 우리의 경계에 포함되지 못하는 이들의 왈가왈부는 무시한다면 결국 우리우리의 사유도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육을 둘러싼 사유가 대중화되지 못할 때, 교육 문제를 두고 대안을 그려가는 상상력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교육학 연구자는 기존 교육학의 콘텐츠, 시스템의 언어에 익숙해지고 인정받지 못하면 감히 실험적인 연구를 시도할 수 없다. 교사는 학교 시스템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잘 해내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이렇게 이미 주어진 일들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새로운 상상까지 모두현재의 교육전문가들이 떠안겠다는 것은 욕심이다. 우리끼리만 교육에 대해 말하고, 고민할 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광범위하게 교육을 사유하고, 또 말하게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어떻게이다. 바로 앞 문단에서 소위 교육전문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전담하는 것이 욕심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욕심의 이면에는 이미 자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책임감이 붙어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를 위한 첫 걸음은 어찌됐든 전문가집단이 뗄 수밖에 없다. ‘교육전문가라고 묶어서 표현하긴 했지만, 교육과 관련해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지식을 쌓았고, 지금 어떤 맥락에서 활동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시도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그 n개의 시도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는, 나의 고민과 관심이다.


교육의 눈으로 사회와 문화를 읽어보기


나의 관심은 교육학적 사회/문화비평이다. 여기서 비평이란, 사회/문화현상으로 나타나는 징후들을 교육의 관점에서 포착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말한다. 사회/문화현상이 텍스트가 되고, 그 텍스트에 의미를 부여하며 읽어나간다는 점에서 넓은 범위의 문화연구라고 볼 수도 있다.
     이제 거품이 좀 빠진 것 같지만, 불과 2~3년 전까지 지속된 자기계발서열풍을 예로 들어보자. 2000년대 한국 출판계의 화두는 단연 자기계발서였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그 전에도 그랬듯 출판시장의 베스트셀러는 대개 유명 작가들의 문학작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3년부터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소위 미국산 자기계발서들이 조금씩 등장하며, 2005~2008년에는 자기계발서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자기계발서가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붐은 2009년 이후 다시 문학이 주목받기 시작하며 점차 사그라지지만, 2011년에도 여전히 베스트셀러 20위 안에는 유명출판사의 영어시험 대비 교재가 몇 권씩이나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노동시장 진입, 그리고 그 안에서의 생존을 위해 스펙을 쌓고자 하는 노력을 반영한다. 정치, 경제, 사회의 관점에서 이런 현상에 대한 비평은 언론지면에 차고 넘치며, ‘88만원 세대라는 용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자기계발서 붐과 스펙 열풍이라는 징후로 드러나는 사회 현상에 대해 교육학의 관점에서 비평하는 담론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자기계발서는 결국 삶의 특정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행을 준비하는 학습자들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것이며, 스펙경쟁이란 것도 학력 인플레 등 우리 사회의 교육제도와 그에 관련된 지배적 규범, 문화라는 맥락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렇게 보면 교육학적 관점에서 이 현상을 비평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사회현상으로 드러나는 징후들 외에 교육학의 비평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영역으로 대중문화가 있다. 텍스트로서 대중문화를 읽어내는 시도는 이미 대중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인문학자들 사이에서는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언론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는 사회과학자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당장 얼마 전만 해도 뿌리 깊은 나무같은 드라마를 통해 사회철학 논쟁, 한국 사회의 정치적 욕망 등을 읽어냄으로써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교육학 안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비평은 볼모지에 가깝다.
      지금은 대중문화를 엔터테인먼트의 의미로 한정해서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DMB의 보급에 이어 인터넷 방송이 시작됐고, 스마트폰, 태블릿이 대중화되며 팟캐스트와 같은 새로운 문화유통 플랫폼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대중문화는 기술의 발달과 함께 점점 더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에 침투하고 있다. 일상이 달라지고 생활스타일이 달라지면 자연스레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19세기 학교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학생들과 생활한다는 표현에 담긴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교육의 관점에서 문화를 해석하고 읽어낼 필요가 있다.


애니메이션 <퓨처 라마>의 한 장면


이제 위대한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의 사례를 통해, 대중문화와 관련해 내가 상상해본 몇 가지 교육학적 비평작업들을 제시해보겠다.
       첫 번째는 대중문화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징후들을 읽어내고 분석하는 작업이다. 위대한 탄생2011년 한국 사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서바이벌/오디션 프로그램들 중에 하나이다(지금도 방송 중이다). 서바이벌/오디션 프로그램에 대중이 열광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석이 나왔지만,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퍼스타K위대한 탄생의 시스템을 두고 시청자들이 보인 반응이다. 슈퍼스타K의 경우, 심사위원들이 참가자들의 공연을 보고 점수를 매기며, 점수가 높은 사람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다. 반면에 위대한 탄생의 경우, 최종 12명이 남은 후부터는 슈퍼스타K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그 전에는 5명의 멘토들이 점수가 아니라 합/불 여부를 결정해 다음 라운드 진출자를 정하고, 나중에는 자신이 직접 가르칠 제자를 뽑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멘토들이 각자 4명의 제자를 뽑는 라운드가 방송을 타자 시청자 게시판과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정성의 상실이라는 평가가 줄을 이어 올라왔으며, 몇몇 연예전문매체에 기사화되기까지 했다. 논란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A라는 참가자가 더 잘했는데, 아무도 A를 뽑지 않아 A는 탈락하고, BA보다 못했지만 B를 선호하는 멘토가 있어서 붙었다는 것이다. 점수제였다면 A는 합격하고 B는 떨어졌을 것이라며, 위대한 탄생슈퍼스타K에 비해 공정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시스템이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나는 여기서 드러나는 대중의 공정성에 대한 욕망을 우리 사회 교육제도의 특징, 그리고 교육을 둘러싼 지배적인 규범과 결합해 공교육 시스템을 비평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계량적인 수치로 학생들을 평가해 줄 세워야 하는 기관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교사와 학생이 만나 성장을 도모하는 기관이어야 하는가? ‘/이 아닌 점수를 원하는 모습은, 행정당국은 상대평가를 강요하고 학생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학점을 받으면 계량화된 근거를 요구하는 요즘 대학의 풍경과 어떻게 겹치는가? 일렬로 줄 세워진 학벌과 영어점수 등 기계에나 쓰던스펙이라는 용어로 수치화되는 인간이 이 땅의 교육기관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 그런 기대들이 공무원 사관학교같은 대학 광고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런 방식의 작업에서 위대한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의 역할은 대중의 교육과 관련된 욕망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슈퍼스타K위대한 탄생중에 뭐가 더 낫다 아니다 논쟁하거나, 본질적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냉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 프로그램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과 욕망을 포착하고, 그 안에서 교육학적 의미를 발견/맥락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위대한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의 콘텐츠 자체를 텍스트로 읽어내는 작업이다. 위대한 탄생은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인 수련생들이 멘토들의 지도를 받아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방송에서는 오디션 장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이들이 가수라는 길을 택했는지, 노래를 어디서 배웠는지, 어떤 경험들을 해왔는지 등을 드러낸다. 이러한 참가자들의 내러티브는 그들이 어떤 곡을 선곡하고, 어떤 가사에 특별히 감정을 이입하는지와 연결되며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렇게 대중문화의 콘텐츠에 흐르는 이야기는 비평을 위한 텍스트로서 커다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드라마 등 많은 대중문화 콘텐츠에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지금까지 얼마 되지도 않는 교육학자들의 비평작업이 그나마 죽은 시인의 사회와 같이 확연히 문제적인 학교의 모습을 담고 있거나, 매트릭스처럼 사제관계/청출어람의 양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만을 대상으로 했다면, 앞으로는 수많은 대중문화 콘텐츠에 담긴 캐릭터들의 성장과 갈등, 변화에 대해 교육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바라봐야 한다. 교육영화, 교육도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교육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사고하자는 것이다. 특히 그동안 소설, 영화 등과 달리 비평의 영역에서 소외된 게임, 웹툰, 예능프로그램과 같은 다양한 서브컬처에 담겨진 이야기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는 하이컬처다 서브컬처다, 학문이다 오타쿠다, 성인용이다 어린이용이다, 예술이다 엔터테인먼트다 하는 구별 없이 자유롭게 분석하고 자유롭게 비평하는 것이 우리가 사회를 보다 잘 이해하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에서도, 패러디로 가득한 웹툰에서도 교육을 발견하고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때, 우리의 사유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대중문화의 생산/소비활동과 유통되는 상품 자체에서 교육의 모습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대중문화 콘텐츠를 생산/소비하는 사람들이 과연 자신()의 생산/소비 활동을, 그리고 생산/소비하는 콘텐츠 자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증언을 통해 교육경험을 분석하는 작업도 상상할 수 있다. 패러디와 같은 ‘2차 생산이 문화소비의 중요한 양상이 되어가는 지금, 특정한 문화를 향유하는 팬덤 내부에서 이뤄지는 교류를 교육의 관점에서 읽어낸다면? 혹은 프로그램의 진화를 교육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위대한 탄생과 같은 시즌제 프로그램의 경우, 이전 시즌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다음 시즌에서는 프로그램의 단점을 보완하고, 또 새로운 시도를 포함시키고는 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변화를 설명하려면 프로그램 생산자들의 전문성 향상,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들의 평가, 기술의 발달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무한도전과 같이 오랫동안 방송되며 자기진화를 거듭한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지금 당장이라도 프로그램의 성장과 변화라는 관점에서 분석해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에이 설마요 ㅠㅠ



바깥을 상상할 때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즐겁다. 친구 한 명은 이 글의 아이디어를 듣고 교육학이 재미없냐?”고 물었다. 당연히 재미있다. 재미있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겼으면 좋겠다. 여기서 제시한 비평작업은 그렇게 교육학이 사람들에게 공유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 스스로도 아직 부족한 아이디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는, 여기서 머리를 더 짜내기 보다는 내가 직접 보는 드라마, 웹툰, 영화, 소설, TV 프로그램 안에서 교육의 의미를 찾아내고, 사람들과 공유하는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원래 대학원 수업에 보고서로 제출했던 글을 오늘의 교육에 기고하기 위해 다듬으며, 지난 1년 출판된 오늘의 교육의 목차와 글 몇 개를 다시 훑어보았다. 교육 불가능, 학생인권,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논하는 언어들은 익숙하면서도 생경했다. 그간 교육운동 진영에서 제기해온 한국 교육시스템의 문제가 여전히문제라는 점에서 익숙했다면, 진보적 교육담론의 전개양상을 전환하려는 시도들은 생경하게 다가왔다. ‘생경하다는 건, ‘신선하면서도 충분하거나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뭔가 부족해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체제의 바깥을 상상할 때는 항상 이렇게 생경한 장면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온라인 게임(MMORPG)을 통한 시민교육의 가능성을 연구하기도 한다. 게임과 교육이라니,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가장 어색한 단어조합이다. 하지만 우리가 게임이든, 노동이든, 연애관계든, 수업이든, 가리지 않고 우리의 삶 안에서 교육을 사유할 때, 학교라는 시스템보다 교육이라는 인간현상을 중심에 둔 담론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우리의 관념에 교육을 가두지 말자. 교육은 학교에서도, 학교 바깥에서도 일어나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이렇게 우리 인간人間의 삶에서 교육을 조망할 때, 학생과 인권人權, 교육과 생태生態를 자연스레 연결시키지 못하는 후진성을 극복할 인식의 단초가 떠오를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