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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리뷰

[도서]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 하나 : 교육의 역할을 고민하다













사실 리뷰 쓸 책은 끊어서 읽기 보다는 한 호흡으로 읽는 걸 좋아하고 글도 고민이 끝나면 뚝딱 내는 편인데. 아무리 그래도 넘쳐나는 과제들의 압박 속에서 마감에 쫓겨 너무 급하게 썼다는 느낌이 든다. 뭐 편집자가 OK했으니까 개소리는 아니란 뜻으로 받아들이고 ㅠ_ㅜ

<교육공동체 벗>에서 내는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2011년 5,6월호에 기고한 리뷰


 

 교육의 역할을 고민하다

- 신명호,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
 


차가운 봄, 차가운 언어


흩날리는 벚꽃이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을 알리는 4월이다. 우리를 둘러싼 계절의 색깔은 점점 화사해지고 있다. 하지만 봄기운의 따뜻함 사이로 여전히 얼음 같은 차가움이 스치는 것은 비단 꽃을 시샘한 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올해만 벌써 몇 명인지, 대학생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있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지적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이들은 소위 말하는 성과를 포기할 수 있냐고 받아친다. 이런 구도의 논쟁을 지켜보면 한 사람의 삶, 그리고 그 삶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이해는 부족하고 너무 거대한 이야기들만 오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신자유주의와 경쟁 논리에 대한 논의는 닳고 닳도록 쌓여 왔다. 그리고 분명히 그 논의는 지금도 유효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거대한 사회 구조 너머에서 그 구조와 때로는 맞물려서, 그리고 때로는 별개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차가운 다섯 글자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육 불평등 재생산에 작용하는 문화적인 요인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는 바로 그 구조 너머의 것을 바라보는 작업이다. 지금까지 교육 불평등에 대한 논의는 주로 부모의 학력 수준, 혹은 사교육비 부담 능력이라는 계량적이고 딱딱한 지표를 통해 이뤄져 왔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논의들이 착각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의 믿음과 달리 사교육이 학업성적에 미치는 효과는 일정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크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아주 미미한(사실상 무의미한) 경우도 있다. 학업 성적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교육에 투자한 시간이 아니라,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학업 열의이다. 그렇다면 가정 차원에서 교육 불평등의 원인을 탐색할 때에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자녀 교육에 투자하는가?’보다 자녀의 학업 열의를 높이기 위해 부모는 어떤 일을 하는가? 그리고 왜 그렇게 하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서는 책상머리에서 각종 수치들과 씨름할 것이 아니라, 실제 중산층, 저소득층의 부모/자녀들을 만나 그들의 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저자는 소득과 학업 성취(대학 진학)를 기준으로 분류한 29개의 가정을 직접 찾아가 연구 참여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낸다. 대학 진학률이 80%에 달하는 사회에서 그 목소리들은 낯설기보다는 친숙하다. “성공하려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 “성적이 나쁘면 틀린 수대로 맞았어요”, “언제까지 컴퓨터 할거냐등 누구나 한번쯤 직간접적으로 접해 봤을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할지라도, 실제 중산층/고학력 부모 밑에서 자라는 자녀들과 저소득층/저학력 부모 하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은 상당히 다른 삶을 경험한다.

대부분의 경우 중산층/고학력 부모들이 저소득층/저학력 부모들보다 자녀의 학업 열의를 높이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한다. “드라마 같은 거를 보시다가, 노숙자나 못사는 사람이 나오면 저를 불러요. ‘공부 못하면 이렇게 된다’”, “이과를 가면 의대를 가고, 문과를 가면 법대를 가라.” 중산층/고학력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지금보다 더 낮은 수준의 삶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소위 말하는 좋은 직업에 대한 열망을 심어 줌으로써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그 과정에서 학업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차단하는 생활 통제도 병행된다.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뒹굴 거리지 말라고 항상 주의를 주시고, 놀러 나갈 때도 (……) ‘공부하고 나가는 거냐?’” 부모의 이런 태도는 때로 자녀와 갈등을 일으키고 가정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한 중산층 가정의 사례를 보면 서울대에 입학한 아들이 대학 상담 센터에서 고등학교 때 유별나게 자신을 잡았던어머니의 태도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진단을 받은 이야기가 나온다. 놀라운 것은 이 문제로 항의하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던진 대답이다. “만일 그 시점으로 다시 가서 내가 그렇게 했으면 네가 트라우마가 생길 거기 때문에 엄마가 그렇게 안 할 건가? 난 그거 아니다. 내가 너를 서울대에 넣고 너하고 원수가 지더라도 엄마는 너를 서울대에 넣기 위해서 그때처럼 노력했을 거다.” 자녀와 원수가 되는 것까지 불사하며 자녀를 서울대에 보내고자 하는 것은 왜일까? 그건 바로 부모들 자신이 고학력자로서 학력 자본의 위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산층은 저소득층에 비해 현재 영위하는 삶의 질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그러다 보니 자녀가 불만을 표시하거나, 힘들어 보여도 교육에 관여하는 방법을 조금씩 바꿀 뿐이지 궁극적으로 높은 학력, 높은 학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식에는 변함이 없다.

앞의 이야기를 뒤집으면 그대로 저소득층의 이야기가 된다. 저소득층/저학력 부모들은 학력 자본의 위력을 몸소 체험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노가다 판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것에는 높은 학력/학벌이 이득을 주지도, 낮은 학력/학벌이 피해를 주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고학력 부모들에 비해 저학력 부모들이 오히려 높은 학력과 학벌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저는 고등학교도 못 나왔다고 막 후회하고, 그런 적은 없어요. 살려고 생각하면 큰돈은 못 벌어도 살아는 져요.” 그러다 보니 자녀의 교육에도 상대적으로 덜 집착하고 덜 관여하게 된다. 저소득층/저학력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거나,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강도가 중산층/고학력 부모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 따라서 생활 통제가 심하지 않기 때문에 자녀가 알아서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아니면 다른 일에 몰두하게 된다. 중산층/고학력 부모들의 교육 관여를 관리와 통제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저소득층/저학력 부모들의 교육 관여는 무관심과 방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 짚어본 것들 외에 자녀들의 교육을 뒷받침하기 위해 들이는 비용과 시간이라는 물리적 자원의 차이, 교육/입시와 관련된 네트워크의 유무 등 다른 요인들 역시 중산층/고학력 부모들과 저소득층/저학력 부모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데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학업 열의라는 것은 어느 정도 자녀의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요인들보다 저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학력 자본에 대한 판단의 차이계층 하락에 대한 두려움의 차이이 두 가지가 계층 간 양육 관행의 차이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문화적 요인이라는 사실이다.

 

문화 이해로부터 이어지는 실천

 

결국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는 교육 불평등 재생산에 작용하는 문화적 요인에 대한 연구서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폴 윌리스는 학교와 계급재생산을 통해 풀어낸 바 있다. 그 책의 말미에서 윌리스는 말한다. 


문화적 형태들의 일반성을 인식하는 것과 그들 나름의 과정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이미 체제 내부의 취약점을 키우기 시작하는 것이고, () 모종의 자기변형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만사형통은 아니지만 적어도 새로운 시작은 될 것이다. 월요일 아침 - 새로운 시작이란 반드시 매번 똑같은 월요일 아침의 끝없는 연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373)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그 문화와 맞물려 있는 체제를 변화시키는 씨앗이 된다. 그렇다면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보다 좀 더 아름다운 - 교육 불평등 재생산의 고리를 약화시키거나 끊을 수 있는 - 월요일 아침을 만들기 위해 어떤 실천을 만들어 갈지 모색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해법은 1) 빈곤/정서적 문제 해결을 통한 가정의 안정화, 2)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해소, 3) 취약 계층 교육 지원 프로그램 강화, 4) 수월성 교육이 아닌 평등의 교육 실현, 이렇게 네 가지이다. 구체적인 해법들에서도 드러나듯, 저자는 교육 기회의 평등을 통해 사회경제적 평등이 이뤄진다기보다는, 사회경제적 평등이 구현됐을 때 교육 기회의 평등이 이뤄진다고 보고 있다. 교육 제도에 미치는 사회경제적 요인들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인식은 꼭 틀린 것이라고 보기만은 어렵다. 하지만 이 해법만으로는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 아쉬움은 저자의 접근이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첫째, 교육 불평등 재생산의 이유로 지적된 문화적인 요인들을 바꿔 내기 위한 미시적인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둘째, ‘사회교육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사회의 관점에 집중해 해법을 제시할 뿐, 교육의 관점에서 어떤 능동적인 실천이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한 충분한 고민을 엿볼 수 없다. 

첫 번째 문제는 비교적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이 연구의 가장 큰 의의는 교육 불평등의 재생산에는 부모의 사교육비 지출 능력보다 더욱 직접적인 문화적 요인이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사회경제적인 평등이 어느 정도 실현되면 모든 이들이 거의 비슷한 문화적 행동 양식을 보이게 될 것인가?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게 바로 문화 분석이 가지는 중요한 의의라고 생각한다. 지금 저자가 제시한 해법은 서문에서 저자 그 자신이 강조한 문제가 가지는 복잡성이라는 인식을 생략하고 넘어간다는 느낌이 든다. 

두 번째 문제는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하다. 저자의 해법은 어느 정도 맑시즘의 아이디어, 즉 상부 구조로서 교육과 하부 구조로서 사회경제적 토대를 구분하고, 하부 구조가 상부 구조를 규정한다는 유물론적 분석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이 사회경제적 토대가 바뀌길 기다리는 것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저자도 사회와 교육의 관계가 일방적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사회복지학이라는 저자의 학문적 배경과 가정을 중심에 둔 연구의 설정 상 교육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이 책에서 많은 얘기를 할 수 없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공은 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넘어온다.

 

교육의 역할을 고민하기

 

과연 교육 현장의 실천가들은 어떤 기획을 통해 교육 불평등 해소에 기여할 수 있을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가정과 더불어 학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는 학교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학교는 저소득층도 접근할 수 있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오성철은 학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학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당연히 모두를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모두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모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태어날 때부터 운이 나빴던 학생들, (……) 기댈 곳이라고는 학교밖에 없는 학생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던 학생들, 우리가 잊고 있었던 학생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가정에서 길러지는 학업 열의가 불평등하다면,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학교에서 그 학업 열의를 촉진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본다면 어떨까? 이는 저자가 제시했던 세 번째 해법을 사회복지의 차원이 아닌 공교육의 차원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향으로 고민을 이어 가다 보면 결국 공교육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합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미 입시/선발과 관련된 기능은 사교육 주도하에 놓여 있다. 그런데 지금의 교육정책들은 사교육 주도의 입시/선발 기능과 별개로 공교육이 가지는 의미를 세우려고 하기보다는, 사교육의 기능을 축소시키거나 공교육의 틀 안으로 흡수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교육평론가 이범은 이런 상황에 대해 이범의 교육특강에서 지금의 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닌 평가기관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그러나 공교육이 교육보다 평가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또 사교육을 다 없애 버리고 그 기능을 공교육 안으로 흡수하면, 혹은 저소득층 부모들도 지금의 중산층 부모들처럼 자녀의 교육에 관여할 수 있는 시간과 비용을 확보한다면 문제는 해결된 건가?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에서 제시하는 해법에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학업성적평가에만 올인하는 지금의 공교육 시스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없다면, 부모들이 자녀의 교육에 더 많이 관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모든 부모들이 자녀의 다양한 재능이나 흥미를 키워주기보다는 좋은 학업성적이라는 획일적인 목표를 향해 자녀를 채찍질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는 헬리콥터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직 학업성적’, 그리고 그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학업 열의가 교육의 가장 중대한 목표여야만 하는가? 책을 읽는 내내 교육을 둘러싼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교육 현장에서 살고 있는’, 즉 그 현장의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직접 체험하고, 또 새롭게 구성해 가는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면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바람은 교육 현장에서 실천가들의 치열한 고민과 합의를 통해 교육 현장의 지향/논리가 탄탄하게 세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온갖 외부의 논리에 따라 교육 현장이 - 대표적으로는 학교가 - 좌지우지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폴 윌리스의 말을 다시 한 번 빌리자면, ‘새로운 월요일 아침을 위한 변화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더욱 힘차게 변화의 바퀴를 굴려 갈 수 있는 동력, 즉 교육을 둘러싼 치열한 고민과 역동적인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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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채널e <헬리콥터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