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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흔적

홍진경, 최시원, 그리고 유병재


홍진경, 최시원, 그리고 유병재

- <무한도전: 식스맨 특집> 4회차 방송을 보고



요즘 예능계의 핫 이슈는 뭐니뭐니해도 <무한도전: 식스맨 특집>이다. 이 특집에서 시청자는 어느 정도 심판자의 위치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재석이 원래 자기 역할(진행+캐릭터 설정+리액션 등 웃음포인트 구축)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기존 멤버들은 중간에 한 마디씩 거드는 패널 수준이고, 이야기의 흐름은 철저하게 식스맨 후보들의 '검증'과정에 맞춰있다. 그 검증이라 함은 1) 제작진의 편집을 거친 방송을 2)시청자들이 보고 3) 그에 대해 어떤 반응을 쏟아내느냐의 문제이다. <식스맨> 특집 방송이 끝날 때마다 실검에 후보들 이름이 쭉쭉 올라오는 건 물론 SNS와 연예기사를 통해 즉각적인 피드백이 나온다. 기존의 무한도전 특집에 비해 이 피드백은 제작진의 향후 방향 설정에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청자들이 누가 재미있었네 없었네, 누구는 식스맨이 되면 좋겠네 아니네 하면서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느 정도 '심판자'의 권능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싶은 것이다. 그런데 방송을 보면 심판자는 커녕 뭔가 내 처지가 초라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분명 예능 프로그램의 본분은 웃기면 된다는 것이고, 나도 <식스맨> 특집을 볼 때는 마음 속으로 누군가를 응원하며 재밌는 장면에서 많이 웃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본분'을 잠시 잊고 현실의 내 모습을 '식스맨이 되고자하는 후보'에 투영해보면 씁쓸함이 남는다. 특히 오늘(4월 4일) 방송에서 좀 노골적으로 부각되긴 했는데 <식스맨> 특집이 회차를 거듭할수록 홍진경과 최시원의 대비가 눈에 밟힌다. 


홍진경은 처음 집에 찾아갔을 때부터 쭉 PD/제작진(甲)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물론, 자기의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에 쫓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렇게 열심히 발버둥치는 모습의 결과물이 썩 좋지도 않다. 웃음은 나오지만 다른 출연자들에 비해 빵터지진 않는달까. 남장이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통해 이 시대 예능 프로그램의 남성편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긴 했지만, 그 문제가 중요하다 해서 안 웃긴데 응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다른 예능에서 활약한 바 있는 다른 여성 방송인들과 비교해도 특별히 예능감이 탁월한 것도 아니고 민속춤 창작이나 분장 등의 코드가 초라해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이건 물론 개인 취향일 수 있다 ㅇㅇ) 

 

반면에 최시원은 다르다. 이미 아쉬울 것 없는 월드클래스 스타라는데 심지어 애정이 철철 넘치는 무도바라기이기까지 하다. 여기에 특별히 의식하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그 '미국식 리액션'에 대한 멤버들(특히 유재석)의 리액션으로 웃음점수까지 획득. 여기에 해외의 수많은 스타들과의 친분까지 (개인적으로는 무한도전이라는 방송에 특별히 도움될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누가 봐도 탐날만한 인재다. 결과가 어찌될지 모르지만 스케쥴 문제가 없다면 현재 상당히 유력한 후보임이 틀림없다. 그래서일까, 방송에서도 시종일관 여유가 넘친다. 누구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자기가 가진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오오~"하고 탄성이 나오고, 자기가 재밌어서 빵 터지면 옆에서 그걸 보고 같이 터져준다. 이정도면 예능에선 축복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런 모습이다. <무한도전>이 직장이고 홍진경과 최시원이 구직자라면, 홍진경은 특별히 잘난 것 없는 고만고만한 배경을 가진 '지원자'고 최시원은 누구나 탐낼만한 '인재'인 것이다. 현실의 수많은 구직자들은, 아니 이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기분 나쁠 수 있으니 일단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홍진경의 발끝에나 미칠 수 있을까 말까인데 기업님들이 요즘 찾아 헤매신다는 인재는 최시원인 것이다. 이 간극에서 오는 씁쓸함에 <무한도전>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뜩이나 <무한도전>은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지 '이건 좀 오버다' 싶은 비판들도 많이 받으니까. 다만 오늘 방송을 보면서 2011년 '대학수학능력특집' 때 나왔던 기사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문제는 '무도' 멤버들이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유치원생들과의 연전연패를 하는 동안 학부모들과 함께 시청한 또래의 아이들은 TV에 나온 동연배의 아이들과 호흡을 함께 한 게 아니라 오히려 '무도' 멤버들과 동질감을 느끼게 됐다는 점이다.

 - <‘무도’, 왜 선행학습을 조장했나> 엔터미디어 (2011년 11월 8일)


솔직히 <무한도전: 대학수학능력시험 특집>이 선행학습을 조장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방송을 보고 내 아이는 저렇게 똑똑하지 못하니 선행학습을 시켜야겠어, 라고 생각하는 부모의 책임이지;; 하지만 '대한민국 평균이하'를 지향했던 <무한도전>이 더 이상 그 슬로건에 부합하지 않은 '만능 인재'로 성장해가면서 제작진 입장에서도 웃음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변화의 의도치 않은, 그리고 어쩌면 굉장히 미미할 수 있는 효과가 바로 오늘 방송에서 내가 느낀 씁쓸함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병재가 식스맨이 되길 원했다. 유병재가 키가 작고 다른 후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명이라, 그러니까 '대한민국 평균이하'라는 슬로건에 맞아서가 아니다. 이미 몇 년 전에 <무한도전>은 '대한민국 평균이하'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다만 유병재가 무도에서 짧게나마 보여준 캐릭터, 예를 들면 초면에 반말하는 광희에게 정색한다거나 -_-ㅋ 최시원의 후광이 빛날 때마다 멋있어하며 쳐다보는 모습은 홍진경이나 광희처럼 대놓고 최시원을 질투하는 모습보다 오히려 더 공감이 갔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SNL에서 직접 몸으로 보여준 연기. "아프니까 청춘이잖아"라는 개소리에 "아프면 환자지 개새끼야. 뭐가 청춘이야"라고 던질 수 있는 바로 그 캐릭터 ㅋㅋ



물론 짜여진 꽁트와 리얼 버라이어티는 다르긴 하지만, 뭐랄까 이런 캐릭터의 유병재라면 버라이어티에서도 소소하게 재밌는, 그리고 무엇보다 겉멋 부리지 않고 센스로 만들어내는 웃음을 연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음, 어쨌든 유병재는 최종후보에서 탈락했고, 나는 그 아쉬움을 주절주절 길게도 풀어놨다. 사실 몇 번 반복해서 썼지만 난 예능은 웃기는 게 우선이고 그 과정에서 <개그 콘서트>나 <코미디 빅리그>처럼 심각한 수준으로 차별 코드를 남발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나 다른 루트로나 <무한도전>에 제기되는 문제들은 어쩌면 쓸데없이 커진 영향력 때문에 따라오는 쓸데없이 큰 책임감의 문제에 가깝지, <무한도전>이 명백히 '잘못했다'고 할만한 일은 없지 않나 싶다. 그냥, 언제 여력이 되면 한 번 정도 2013년 <무한상사: 뮤지컬> 특집에서 보여준 시대의 아픔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시 담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깔아보며. 오늘자 <무한도전> 감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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