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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Opinion

교육현장의 '지금'으로 교육정책의 '공백'을 채우기














교육현장의 '지금'으로 교육정책의 '공백'을 채우기

대통령 선거 교육정책 단상




대통령 선거 관련 기사가 매일 같이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있다. 사람마다 조금씩 이번 대선에 부여하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역시나 가장 뜨거운 관심사는 야권 후보의 단일화와 정권교체 가능성일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박근혜 후보가 되든 야권 단일후보가 되든 변하는 건 없다며, 중요한 건 변혁을 추동하는 운동이라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냉소해버리기에 대통령이 우리 사회에 가지는 상징과 힘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운동의 성과와도 직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의 경우, 분명 기나긴 학생인권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성과지만, 2010년에 보수성향의 교육감이 당선됐다면 그 도입이 몇 년 더 유예됐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시 말해, 제도 바깥에서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움직임이 중요한 만큼이나 제도정치 안에서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자연스레 우리 사회의 교육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유력한 대선주자들이 내놓고 있는 교육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 주요쟁점이 될 만한 교육정책의 비교, 분석에 있어서는 훌륭한 책이나 기사가 이미 충분히 나와 있다. 아마 대선이 다가올수록 대선후보들이 말하는 교육정책, 우리 사회 교육의 비전에 대한 분석은 여기저기서 더 많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영화 <약 서른 개의 거짓말>에는 거짓말을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나온다. 바로 핵심 이외에는 전부 진실을 말하는, 즉 핵심에 대해서는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핵심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보다는 무엇을 말하지 않고 있는지, 즉 무시당하고 있는 주체는/담론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것은 바로 이렇게 교육정책에서 말해지지 않는, 혹은 무시되는 것들이다.


 

교육정책의 한계

 

우리 사회에서, 특히 선거 국면에 화제가 되는 교육정책은 대개 입시와 관련된 정책, 혹은 교육비를 경감하는 정책인 경우가 많다. 올해 대선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진행된 반값등록금 운동의 성과로 유력후보들은 모두 반값등록금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 대선을 앞두고 대학입시 간소화, 고교무상교육, 0~5세 아동의 무상보육, 혁신학교 확대, 진로교육 강화, 특목고 관리감독 강화 혹은 고교서열화 해체, 고교학점제, 국공립대공동학위제, 지역거점대학 육성, 사교육비 경감 등등의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기서 혁신학교의 확대와 진로교육 강화, 고교학점제를 제외하면 모두 입시 정책, 혹은 교육비 경감 대책이며 실제 언론에 노출되는 후보들의 주요공약 역시 입시 혹은 교육비에 관한 것들이다.


분명히 입시의 문제, 보다 근본적으로 대학 서열화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 심각한 병폐를 유발하고 있는, 꼭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거칠게 정리하면, 대학 입시에서 과도한 경쟁을 유발해 중등교육을 왜곡하고, 구직/노동시장에서는 학력과잉에 따른 사회적 비용 증가와 학벌에 따른 차별의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나 정책이 현존하는 사회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라면, 교육정책에서 대학서열화나 입시경쟁의 문제를 빼놓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하지만 입시경쟁이 중등교육에 있어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게 중등교육의 모든 문제는 아니다. 다시 말해, 입시로는 수렴되지 않는 중등교육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입시/대학서열화로 수렴되지 않는 고등교육의, 노동시장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입시경쟁 하나만 해결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처럼 입시정책에 집중하는 선거캠프들을 보고 있으면 조금 답답하다. 눈앞의 커다란 괴물, 그것도 쉽게 어쩌지 못하는 괴물만 쳐다보고 있으니 다른 것들이 안 보이는 형국이랄까.


어쩌면 이런 인식의 한계는 교육을, 학교로 대표되는 교육제도를 도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을 통해 무언가를 이룬다는, 무언가라는 목적이 따로 있고, 그 목적이 교육이라는 과정 전체를 지배하는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면 그 자리에 좋은 대학이 아닌 다른 무엇이 들어간다 해도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안철수 후보 캠프에서는 교육정책을 발표하는 회견장에서 교육은 사회구조의 종속변수여서 교육 자체를 개혁하는 것으로 바뀌기 어렵다고 얘기했다.


현실적으로는 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교육은 사회의 자원을 배분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고, 자연스레 사회 전반의 권력구조, 계층구조와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경제적인 성장을 보장한다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고등학교에서 입시에 올인하는 것이 합리적인판단이다. 그리고 입시에 도움이 된다면 사교육을 받는 것도, 특목고 진학이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을 높여준다면 중학교/초등학교 시절부터 고교입시를 준비하는 것이 역시나 합리적인 판단이다. 안철수 후보가 사회의 인센티브 시스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대학서열화로 드러나는 자원의 배분구조를 건드리지 않고서는 교육개혁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일 것이다.

 


교육 현장의 지금에 대한 존

 

하지만 여기서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지워지는 것은 교육이 이뤄지는 현장의 지금에 대한 존중이다. 미래의 어떤 목표를 상정해두고 지금의 행복을 유예하는 대표적인 현장이 바로 학교이다. 고등학교를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는 대입 성적, 즉 명문대 진학률이고, 대학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는 취업률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유력후보들 모두 진로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분명히 진로 교육은 중요하다. 하지만 진로만큼이나, 어쩌면 진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학생들의 이다. 그런데 아무도 고등학생들의 고등학교 생활, 대학생들의 대학교 생활을 근거로 교육기관을, 나아가 한 사회 교육의 질을 평가하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 참고할만한 사례들이 있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일대기,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에는 그가 일했던 보스턴 대학의 학장 존 실버에 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실버는 대학 교육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자녀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 그들 앞에 창창한 미래가 펼쳐지기 바랍니다. 하지만 불행한 사태로 그들이 졸업하자마자 죽는다 하더라도 보스턴 대학에서 보낸 그들의 4년이 값진 것이었다고 여기시게 될 겁니다.” 부모들이 실버의 말에 깜짝 놀라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대다수가 감정이 상했다기보다는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251~252p)

 

실제로 당시의 미국 사회가 대학을 어떤 지표로 평가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대학의 학장이 교육자로서, 교육행정가로서 자신이 맡고 있는 교육현장을 그 자체로 값진 것으로 묘사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똑같은 얘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지난 몇 달간, 나는 졸업논문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여러 군데의 성인문해교육 실천현장을 돌아다녔다. 찾아간 기관마다 그 역사적 맥락과 지향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점들이 있었지만, 인터뷰한 참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이 현장의 학습자들이 지금의 공부가 행복한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성인문해교육의 경우, 나이가 많은 학습자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교육이 아닌 현재의 삶의 질을 위한 교육에 보다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취업률이나 진학률이 아닌 그 행복감이 바로 성인문해교육 현장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는 학습자들의 말을 쉽게 빈 말이라고 일축할 수 없는 이유이다.


물론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은 보스턴 대학 학생들이나 성인문해학습자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사례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육현장의 중심논리가 반드시 미래에 대한 준비, 미래를 위한 현재의 유예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혹시 마야달력의 예언대로 201212월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면, 당장 내일 학교에 나오는 학생은 몇 명이나 될까? 대학서열화와 입시경쟁을 해결하는 것도, 교육비를 줄여서 학부모들의 고통을 줄이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정책의 초점을 학부모나 미래의 학생이 아닌, ‘지금의 학생에게로 옮기면, 이런 정책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엄기호 선생님 트위터 https://twitter.com/uhmkiho/status/265916563104882688


실버의 말을 빌리자면, 졸업한 뒤에 바로 죽더라도 학생들이 학교에서의 경험을 값지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교육정책의 공백을 채우기

 

이렇게 교육현장의 지금에서 출발하는 정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역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대학서열화와 입시는 물론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그 문제들로 인해 발생하는 부정적인 효과들을 줄여가는 것과 별개로, 현장에서 직접 학생들의/교사들의 지금이 행복하기 위한 교육과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학교의 구조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목소리가 나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의 교육> 2호에 이런 내용을 포함한 리뷰를 기고한 적이 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교육 현장에서 살고 있는’, 즉 그 현장의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직접 체험하고, 또 새롭게 구성해가는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면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바람은 교육 현장에서 실천가들의 치열한 고민과 합의를 통해 교육 현장의 지향/논리가 탄탄하게 세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온갖 외부의 논리에 따라 교육현장이 좌지우지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지금도 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이번 대선 후보들의 교육정책에도 커리큘럼이나 학교시스템에 대한 논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혁신학교의 확대라든가, 고교학점제와 같은 정책들이 그나마 이런 관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입시나 교육비 경감 정책에 비하면 비중도 크지 않고 구체성도 떨어진다. , 아직 채워지지 못한, 하지만 채워야만 하는 공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건 현장의 실천가들뿐일 것이다.